오피니언 분수대

오라클 회장의 담대한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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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순방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방문했던 하와이만큼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휴양지도 드물다. 하지만 하와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또 그만큼 드물다. 하와이 주의 137개 섬 가운데 6번째로 큰 섬 라나이가 특히 그렇다. 세계 최고급 호텔 체인 포시즌이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두 개(한 곳은 현재 리노베이션 중)나 있지만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은둔의 섬'으로 불린다.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가 파파라치를 따돌리려고 1994년 이 섬 전체를 통째로 빌려 호텔 앞 해변 골프장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이래 사생활 노출을 피하고 싶은 숱한 유명인들의 휴양지 역할을 해왔다.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라나이 골프 코스. 빌 게이츠가 1994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라나이 골프 코스. 빌 게이츠가 1994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라나이에 와보니 '인간이 이 섬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는 하와이 관광청의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싱가포르 절반 정도의 적지 않은 면적에 인구는 3000여 명이 전부. 포장도로 역시 48㎞에 불과하고 신호등과 대중교통수단은 아예 없다. 또 제한속도라고 해봤자 최대 시속 20마일(32㎞)인데 아름다운 자연에 압도되서인지 아무도 속도를 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건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다와 한때 세계 최대 파인애플 농장이었던 초록 평원과 산의 곡선을 따라 삐죽삐죽 솟은 소나무와 갑작스레 도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슴 뿐이니, 그야말로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섬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나이는 어디를 가나 인간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안혜리 기자

라나이는 어디를 가나 인간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안혜리 기자

하지만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라나이의 자연은 수많은 사람의 손, 특히 억만장자인 오라클 창업주 래리 엘리슨(73)이 손을 댔기에 지금처럼 인간의 손때가 묻지않은 아름다운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본업인 IT비즈니스뿐 아니라 노화방지와 농업생산 등 인류 미래와 관련한 분야에 투자를 많이 하는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중앙포토]

본업인 IT비즈니스뿐 아니라 노화방지와 농업생산 등 인류 미래와 관련한 분야에 투자를 많이 하는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중앙포토]

2012년 포시즌 호텔을 비롯해 수도회사, 묘지 등 라나이 섬의 98%를 3억 달러(추정)에 사들인 뒤 엘리슨이 한 일은 돈을 더 벌 요량으로 섬을 마구 파헤치는 리조트 확장 개발사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족한 식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친환경적인 정수시스템을 갖추었고 비싼 값을 주고도 밖에서 사먹기에 수급이 불안정했던 식자재 자급을 위해 농장을 만들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이 섬을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실험과 투자를 한 셈이다. 라나이를 너무나 사랑해 틈날 때마다 찾을 뿐 아니라 기회가 되면 아예 이곳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엘리슨은 라나이를 거대한 친환경 생태 실험장으로 바꿔놓고 있다.
라나이에서 누구를 만나든 엘리슨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그의 섬 매입 이후에 삶이 업그레이드됐다고 입을 모은다. 엘리슨은 화학물질로 범벅이 된 기존의 대량생산방식과 달리 IT기술을 접목한 친환경 방식으로 온 섬 주민이 먹고도 남을만큼 충분한 로컬 식자재를 생산하겠다는 온실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 시도가 성공하면 라나이 주민만이 아니라 전 지구인의 삶이 업그레이드될 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슨이 먼 미래를 내다보며 꿈을 현실로 바꾸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니 새삼 미국의 저력을 깨닫게 된다. 이 나라가 만약 위대하다면 그건 많은 돈으로 그저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막대한 부를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쓰겠다며 행복한 꿈을 꾸는 엘리슨같은 부자가 많기 때문 아닐까. 라나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