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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②] 유목국가 몽골에서 벌어진 황당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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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청나라로부터 독립 선언했지만 중화민국과 러시아가 방해 #러시아내전 중 백군장군 웅가른슈테른베르크가 점령해 ‘대칸’ 올라 #몽골 복드 칸, 자리 되찾으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도움 요청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 들어섰지만 숙청-집단농장화로 가난 악화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러시아 혁명과 내란의 역사에서 가장 황당한 사건이 1921년 몽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이른바 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수립한 일이다. 이 임시정부는 1924년 11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몽골인민공화국은 1922년 12월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다.

외몽골 지도. 현재의 몽골 공화국이다.

외몽골 지도. 현재의 몽골 공화국이다.

당시 몽골은 산업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저개발 유목 국가였다. 대부분의 국민은 유목민이었다. 도시에는 귀족들과 티벳 불교 승려들, 그리고 상인들이 살고 있었다.  노동자도 농민(유목민은 대다수)도 드문 이 초원의 나라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가 들어섰으니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산자들의 계급혁명을 주장했던 마르크스가 이를 알았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20세기 초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대상 모습. 몽골 조랑말을 타고 혹이 두 개인 고비사막 낙타에 상품을 싣고 다녔다. 사막과 초원을 횡단하는 이런 교역 방식은 수천 년간 이들의 생활 수단이고 교류의 방식이었다. 1924년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 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은 이런 개인적인 상업활동을 금지하고 국영화했다.

20세기 초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대상 모습. 몽골 조랑말을 타고 혹이 두 개인 고비사막 낙타에 상품을 싣고 다녔다. 사막과 초원을 횡단하는 이런 교역 방식은 수천 년간 이들의 생활 수단이고 교류의 방식이었다. 1924년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 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은 이런 개인적인 상업활동을 금지하고 국영화했다.

그 당시 몽골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자시 몽골의 역사를 짧게 알아보자. 몽골은 칭기즈 칸(1155이나 1162, 또는 1167년 탄생 추정~1227년 사망)이 몽골 제국을 세운 뒤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1215~1294, 재위 1260~1294)가 원나라(1260~1368)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다. 몽골의 원나라는 1368년 수도 대도를 명나라에 내주고 북방의 고향으로 옮아가 유목민 국가로서 나라를 새롭게 시작했다. 이를 중국에서는 북원(1368~1635)이라고 부른다. 명나라를 북원을 지배하지 못했다. 북원은 1635년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1654~1772, 재위 1661~1772)가 복속시켰다. 1641년 이후 청나라 황제는 몽골의 카간(대칸)을 겸했다. 청나라 황제는 만주족 이름과 중국식 이름과 함께 몽골식 이름도 하나씩 가졌다.

청나라의 영역. 청나라 시대에 몽골과 티베트, 신장위구르와 동북 지역, 대만 등이 중국의 영토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뒤 외몽골을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중국의 영토로 남았다.

청나라의 영역. 청나라 시대에 몽골과 티베트, 신장위구르와 동북 지역, 대만 등이 중국의 영토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뒤 외몽골을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중국의 영토로 남았다.

청나라는 몽골을 분할 통치했다.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일찍이 후금과 연합을 이룬 지역은 내몽골, 끝까지 버티다 강희제 때 복속한 지역은 외몽골로 불렀다. 내몽골의 몽골인들은 청나라 군대조직 8기 중 하나를 이뤘다. 그 뒤 275년간 청나라의 통치가 계속되다 1911년 10월10일 중국에서 우창(武昌)봉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29일 외몽골의 8부 부족 지도자가 모여 청나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하고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젭춘담바 후툭투 8세(1869~1924)를 국가지도자, 즉 대칸으로 추대했다. 젭춘담바 후툭투 8세는 군주가 되면서 복드 칸으로 불렸다.

초원에서 가축을 치는 유목민들.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이런 삶을 소련식 농업협동화 방침에 맞춰 협동목장으로 바꾸려고 한 몽골인민공화국의 시도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를 강요한 소련도 마찬가지다.

초원에서 가축을 치는 유목민들.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이런 삶을 소련식 농업협동화 방침에 맞춰 협동목장으로 바꾸려고 한 몽골인민공화국의 시도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를 강요한 소련도 마찬가지다.

외몽골에 독립국이 들어서자 내몽골의 49개 부족 중 35개 부족이 합류를 희망하는 등 몽골 고원 전체가 동요했다. 그러자 중화민국 초기 중국을 지배하던 군벌 세력은 러시아제국과 교섭해 1912년 11월 외몽골의 독립선언을 자치선언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추가 협정을 통해 외몽골의 자치권과 중국의 종주권을 동시에 인정하기는 선에서 타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자 중국은 외몽골의 자치권마저 철폐하고 안휘파 군벌인 단취루이(段旗瑞, 1865~1936)의 부하인 쉬슈정(徐樹錚, 1880~1925)을 외몽골의 수도 우루가에 보내 복드칸의 궁전을 무장병력으로 포위하고 자치권 반납을 압박했다. 결국 1919년 11월 중화민국 대총통령으로 외몽골 자치권 철폐를 공포했으며 1920년 1월 2일 몽골 전역을 점령하면서 복드 칸 정권은 사실상 실권을 잃었다.

몽골의 마지막 대칸인 복드 칸. 환생을 인정받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였는데 1911년 외몽골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칸에 올랐다.

몽골의 마지막 대칸인 복드 칸. 환생을 인정받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였는데 1911년 외몽골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칸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말 사건이 벌어졌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 내전을 치르던 백군 소속의 로만 표토로비치 웅게른슈테른베르크(1886~1921)가 부대를 이끌고 몽골에 들어왔다. 웅게른슈테른베르크는 러시아의 군인이자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며 러시아 혁명 와중에 혁명에 대항한 백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몽골에 들어와 수도 우르가에 진주해 있던 중화민국 군대를 격퇴하고 1921년 2월에는 복드 칸을 복위시켰다.
이로써 웅게른슈타인베르크는 몽골에서 일시 ‘해방자’로 숭앙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욕심이 발동했는지 복드 칸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대칸의 자리에 앉았다. 자칭과 타칭을 합쳐 몽골 역사상 대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 가운데 유일한 백인 혈통의 인물이다. 군대로 몽골을 일시 점령해 대칸을 참칭한 인물일 뿐이라며 그를 대칸으로 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력을 갖춘 그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다.

러시아 백군 출신으로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점령해 대칸에 오른 로만 웅게른슈타인베르크 남작.

러시아 백군 출신으로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점령해 대칸에 오른 로만 웅게른슈타인베르크 남작.

잠시 웅게른슈타인베르크의 배경을 알아보자. 그는 ‘발트 독일인’ 귀족의 아들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그라츠에서 태어나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성장했다. 발트 독일인은 12세기 이래 지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해안 지역에 중세 이래 거주해온 독일어 사용 주민이다. 이들은 이 지역에 리보니아 공국, 쿠를란트 공국 등 작은 나라를 세우고 스웨덴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을 종주국으로 섬겨왔다. 하지만 표트르 1세(1672~1725, 재위 1682~1725)가 이 지역 패권국가이던 스웨덴과 대북방전쟁(1700~1721)을 벌여 승리하면서 리보니아 공국을 비롯한 발트해 연안지역을 얻고 재해권을 확보했다.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된 이 지역의 발트 독일인 귀족들은 러시아 궁정과 군대, 정부에서 활약했다. 일부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영지를 내준 뒤 오스트리아나 당시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던 독일 등지로 가서 새로운 영지를 구입해 재정착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던 발트 독일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뒤 난민이 돼 독일 본토로 이주하거나,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 유형을 떠나면서 지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렇게 에스토니아에서 성장한 웅가른슈테른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드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로 이주했다.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마치고 시베리아에 파견됐는데 그때 접한 몽골족과 부랴트족에 흥미를 갖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대대적으로 충돌한 갈리시아(지금의 폴란드 동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북부를 포괄하는 지방)의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에서 참전했다. 당시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용감하고 과감하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군주제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러시아 동아시아지역으로 파견됐다. 당시 이 지역은 바이칼호 부근의 카자크 기병대 사령관 출신인 그리고리 세묘노프(1890~1946)가 지배하고 있었다. 세모노프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을 조직해 볼셰비키에 저항했다. 귀족 출신인 웅가른슈테른도 세묘노프의 백군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중장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백군 지도자로 백군을 몽골에 파견한 세묘노프.

러시아 백군 지도자로 백군을 몽골에 파견한 세묘노프.

웅가른슈테른의 운명은 1920년 말 세묘노프의 명령으로 외몽골 지역에 들어가면서 바뀐다. 그는 쉬슈정이 지휘하는 중화민국 점령군을 쫓아내고 그 지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립했다. 하지만 대칸에 오른 그는 몽골을 가혹하게 통치했다. 웅가른슈테른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존재였다. 1918~1922년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려고 다른 연합군과 함께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의 지휘관 호소노 타츠오(細野辰雄, 1872~1935) 소장이 그를 초청했을 때 받은 인상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당시 호소노는 일본 무사도를 설명하고 일본 군인의 용감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자 웅가른슈테른베르크가 이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일본의 상인들은 셔츠의 길이가 적힌 사이즈보다 너무 짧거나 단추를 풀로 붙이기만 한 불량품을 수출하고 있는데 그들과 같은 부도덕한 행동도 무사도를 따른 것이냐”라고 고함질러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외교적이지 못하고 직선적인 웅가른슈테른베르크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웅가른슈테른베르크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 자신이 부처라는 망상에 빠졌다. 주변에서도 그런 그를 부추겼다. 환생을 적극적으로 믿는 티베트 불교에 교리에 맞춰 부하들은 아부의 발언을 쏟아냈다. 부하들은 그를 ‘칭기즈 칸의 환생’이라며 앞으로 중국과 만주, 티베트를 점령해 과거 몽골 제국에 버금가는 광활한 제국을 세울 것이라고 아첨을 해댔다. 달콤한 아부를 즐기면 자신을 망치게 되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는 주변의 아부 속에 더욱더 깊은 망상에 빠진 듯하다. 몽골의 전통을 부활해야 무사의 기상이 생긴다며 도시에 살던 주민을 초원으로 내쫓아 유목 생활을 재개하도록 강요했다. 환생해서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며 주민을 마구 살해했다. 중국인이나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몽골인은 물론 러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유대인까지 마구 죽였다. 독실한 티베트 불교도를 모아 자신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학살을 지휘했다. 몽골 초원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청나라에서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에서 대칸에 오른 불교지도자 복드 칸의 젊은 시절 모습. 청나라 칭하이성의 티베트족 거주지에서 태어난 그는 몽골 고승이 환생한 것으로 인정 받아 티베트의 라싸에서 교육 받은 뒤 몽골로 보내졌다.

청나라에서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에서 대칸에 오른 불교지도자 복드 칸의 젊은 시절 모습. 청나라 칭하이성의 티베트족 거주지에서 태어난 그는 몽골 고승이 환생한 것으로 인정 받아 티베트의 라싸에서 교육 받은 뒤 몽골로 보내졌다.

이런 공포 통치가 계속되자 몽골인이 당연히 반발했다. 복드 칸은 자신을 대칸 자리에서 처음 끌어내렸던 중국의 베이징 정부에 웅게른슈타인베르크를 제거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베이징 정부는 동북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그는 이익이 없는 일에 움직이지 않았다.

1921년 3월 볼셰비키 혁명에 동조하며 몽골 인민당을 결성한 몽골인 담딘 수흐바타르(1838~1923)과 허를러깅 처이발상(1885~1952) 등이 러시아와 몽골 접경도시인 캬흐타에서 중국인을 내쫓고 몽골 임시인민정부를 수립했다. 몽골 역사에서 1차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를 두고 러시아 밖에서 벌어진 첫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복드 칸은 이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대칸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과거의 지배자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까지 손을 내민 군주의 모습이다.
몽골인민당 수뇌부는 이들은 400인의 의용군을 이끌고 백군 공격에 나서면서 러시아에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소비에트 적군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700명으로 늘어난 몽골의용군과 몽골에 들어온 소비에트 적군, 그리고 1920년 4월 극동지역에 세워진 볼셰비키의 위성국가 극동공화국(치타 공화국이라고도 함)의 군대를 합쳐 1만 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들은 1921년 웅게른슈타인베르크의 백군을 제압하고 수도 우르가를 점령했다. 웅가른슈테른베르크는 사로 잡혔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1917년 12월에 조직한 소비에트 비밀경찰 체카는 웅가른슈테른베르크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 끌고 가 군사재판을 거쳐 총살했다. 그를 체포한 직후 레닌은 군사법정에 ‘그의 죄상은 너무 명백하니 신속하게 총살에 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을 정도다.

1920년 창당된 몽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몽골인민당의 로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상징인 낫과 망치가 보이지 않는다. 농민과 노동자가 거의 없었던 당시 몽골에선 낫과 망치를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1920년 창당된 몽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몽골인민당의 로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상징인 낫과 망치가 보이지 않는다. 농민과 노동자가 거의 없었던 당시 몽골에선 낫과 망치를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러시아 적군과 몽골인민당의 도움으로 복드 칸은 대칸 자리를 되찾았다. 1924년 복드 칸이 세상을 떠나자 임시인민정부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그해 11월에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몽골은 이를 2차 혁명으로 부른다. 몽골인민공화국은 1922년 12월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가 됐다. 수도인 우르를 울란바토르로 이름을 바꿨다. '붉은 영웅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소련이 세운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은 극좌노선을 추구하고 있어 몽골인민공화국도 이를 따랐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1928년 열린 몽골인민혁명당의 제7차 당대회에선 우파를 추방한다며 대대적인 당내 숙청을 강행했다. 몽골인민당의 역대 제1서기와 역대 총리 중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다. 총살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대숙청을 지도한 사람도 숙청돼 총살대에 올랐을 정도다.

몽곡 대칸의 밀지를 받고 몽골에 러시아 적군을 불러들인 몽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과 총리 등을 지내며 스탈린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몽골에서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해 라마불교를 거의 말살한 독재자로 통한다.

몽곡 대칸의 밀지를 받고 몽골에 러시아 적군을 불러들인 몽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과 총리 등을 지내며 스탈린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몽골에서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해 라마불교를 거의 말살한 독재자로 통한다.

1930년에는 대대적인 과거 청산이 이뤄졌다. 우선 옛 귀족, 불교 승려, 유복한 유목민의 재산과 가축을 몰수했다. 과거 지배층을 제거한 뒤 일반 유목민들도 강제적으로 집단농장에 배정해 소련식 유목집단화를 추진했다. 이들은 특히 불교사원을 파괴해 불교를 말살하려고 시도했다. 하급승려는 강제로 환속시켰으며 고위 승려는 처형했다. 개인적인 상업 활동도 금지했다. 그 결과 유목국가 몽골의 가축수가 1930년 2300만 마리에서 1932년 1600만 마리로 감소했다. 유목사회에서 가축의 숫자는 부의 척도다. 가난한 몽골은 더욱 가난해졌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벌어졌다는 몽골 혁명의 실상이다.

몽골은 소련 해체 뒤인 1992년 2월 13일 일당독재와 계획경제 체제를 폐지하고 다당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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