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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문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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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

서울 남대문로에는 100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은행 건물 두 개가 마주 서 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SC제일은행 제일지점이 그것이다. 화폐박물관은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SC제일은행은 1935년 조선저축은행 본점 건물로 각각 지어졌다.

같은 일제시대 건물이지만 외양의 차이가 뚜렷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입구다. 중앙은행이었던 조선은행 건물로 걸어 들어가려면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당시의 고관대작과 부유층을 태운 차는 바로 입구 앞까지 갈 수 있는 구조다. 서민은 사실상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의미다.

반면 20여 년 뒤 지어진 SC은행 건물의 정문에는 계단은커녕 문턱도 없다. 조선저축은행은 소액예금 전문 은행이었다. 식민지 개발과 중일전쟁 준비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지자 푼돈이라도 끌어모으려 만들었다. 그러니 입구부터 일반인들이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했던 것이다.

은행의 ‘문턱’은 그 시대 경제상을 반영한다. 국내에서 가계대출의 문턱이 크게 낮아진 건 2000년대 들어서였다. 자금을 몰아주던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무더기로 쓰러지자 시중은행들이 새로운 살 길을 찾으면서였다. 기업대출에 비해 가계대출은 ‘땅 짚고 헤엄치기’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늘 값이 오르는 데다 규격화돼 거래도 쉬운 아파트가 담보다. 은행은 사실상 ‘무위험’ 자산을 경쟁적으로 늘렸고, 은행원은 고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도 이를 부추겼다. 훗날의 부작용보다 당장의 경기부양 효과가 달콤해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기를 지탱하고 가계는 빚을 줄여간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 가계 빚은 오히려 더 빠르게 늘었다.

24일 나온 가계부채 종합대책은 더 이상 이런 구조를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정부의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러운 규모인데 금리까지 들썩이니 버틸 재간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은행 문턱을 조금씩 높이는 건 연착륙을 위해선 불가피한 일일 테다. 다만 이번 대책의 핵심이 무턱대고 문턱을 높이라는 건 아니다. 대출자마다 총체적 상환능력(DSR)을 제대로 따져 무리가 가지 않은 한도에서 돈을 빌려 주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은행이 실력도 더 쌓고, 품도 더 들여야 한다. 하지만 손쉬운 장사에만 익숙한 탓에 너도나도 신용등급 좋은 고객만 골라받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1400조원의 버거운 짐을 진 가계를 대신해 이제라도 정부는 물론 은행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 눈짓만 쳐다보고, 인터넷전문은행이나 두려워하고 있기엔 그 덩치가 아깝지 않은가.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