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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 노즐과 갑옷 팔의 묘한 일치, 기계 문명에도 정서와 미감이 …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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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08면

사진작가 김용호의 『모든 모던 월드, 자동차 공장에 대한 문화적 해석

현대자동차 러시아 도장공장의 금속 노즐(왼쪽)과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철갑기병의 갑옷팔

현대자동차 러시아 도장공장의 금속 노즐(왼쪽)과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철갑기병의 갑옷팔

지난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찾은 사진작가 김용호(61)는 전시물 중 철갑 기병의 갑옷을 관찰하다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절묘하게 꺾인 팔 부분이 촬영을 위해 찾았던 현대자동차 도색 공장에서 본 로봇 팔 모습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었던 것. “재질이나 곡선의 각도가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자동차에 색을 입히는 기계를 설계한 것도 사람이잖아요. 그 기능에 맞는 인체의 형태를 모방하는 게 당연한 거죠.”

김 작가가 최근 펴낸 『모든 모던 월드(modeun modern world)』는 이런 놀라운 발견이 가득 담긴 기발한 사진집이다. 시작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현대차의 7개 해외 공장(터키·인도·중국·미국·체코·러시아·브라질)을 돌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 하지만 그는 단순히 공장의 이곳저곳을 촬영하는 것 만으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유한 미적 감각과 정체성을 지닌 나라에 세워진 공장에는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문화가 반영되었을 것’이란 아이디어로 전무후무한 ‘이미지 천일야화’에 도전했다. 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터키 의장공장(왼쪽)과 블루모스크 아라베스크 문양

터키 의장공장(왼쪽)과 블루모스크 아라베스크 문양

칸치프람 사원(왼쪽)과 인도 엔진공장

칸치프람 사원(왼쪽)과 인도 엔진공장

체코 프레스공장

체코 프레스공장

500여장의 사진이 담긴 책을 처음 넘기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설명 한 자 없이 페이지의 한쪽 면에는 자동차 부품 더미나 헤드램프 등이 찍혀 있고, 다른 한쪽은 오래된 사원이나 박물관 유물 사진이 실려 있다. 계속해서 넘기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온다. 자동차 내연기관의 파이프를 층층이 쌓아 올린 모습은 옆 페이지에 실린 이슬람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문양과 흡사하고, 주황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자동차 거치대는 빨강·검정실로 짠 양탄자의 색감을 지녔다. 삭막한 자동차 공장에서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발상이 기발하다.
“6년 전부터 현대자동차와 여러가지 협업을 했는데, 그 중 국내에 있는 공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도 있었다. 공장이란 게 여기나 저기나 얼핏 보면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어떤 지점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더라. 예를 들어 자동차 충돌 시험장의 벽면을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벽이 긁히고 깎여나간 모습이 마치 깎아지른 바위 산의 단면 같기도 하고, 휘갈겨 그린 추상화 같기도 했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모아 2013년 『모든 모던(Modeun Modern)』이란 사진집을 내고 전시도 했다. 반응이 좋아 해외편을 제작한 것이 이번 『모든 모던 월드』다.”
처음부터 공장과 문화유산 사진을 함께 담자고 계획했나.
“출발하기 전 기본적인 콘셉트는 갖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해외 공장의 산업적인 모습과 그 지역 문화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모든 곳을 돌아볼 수는 없었기에, 지역에 따라 터키는 실크로드 유적, 인도는 다문화·다종교, 체코는 큐비즘과 아르데코(Art-Deco) 디자인, 브라질은 대자연, 이런 식으로 테마를 잡았다. 같은 브랜드의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니 어느 곳이나 전체적 구조는 비슷한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각 나라마다 특별한 부분이 있었다. 같은 설비라 해도 현지인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니 특유의 미감이 반영되는 거다.”
8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고 들었다.
“2015년 여름부터 1년 여에 걸쳐 7개국 23개 도시를 돌며 찍은 사진이 총 8만 124컷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비교할 대상을 떠올리며 찍은 사진도 있지만, 일부는 찍어 놓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 작업에만 수 개월이 걸렸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자동차 부품이 우아한 아르데코풍 계단 장식과 비슷하다거나, 공장 철제 프레임이 고급 저택이 문살과 흡사했다. 조형적으로도 그렇지만 기능적 유사성까지 지닌 절묘한 데자뷔에 감탄했다.”
촬영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자동차 공장은 일반인들의 견학 코스가 아니다. 공중에 매달린 차체가 움직이는 레일은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어 촬영 중에는 잠시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밧줄을 타고 공장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하고, 폐철재를 쌓아 놓은 공장의 지하실까지 다 가 봤으니 아마 현대차 내부에도 나만큼 현장을 자세히 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들까지 다 촬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덕에 사람들에게 생소한 풍경까지 담아낼 수 있었다.”
특별히 감동했던 순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의 주행테스트장에 갔을 때다. 전세계 주행테스트장을 돌았는데, 그때마다 감동이 밀려왔다. 차 한 대가 이 많은 길들을 통과해 이용자들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이, 그만큼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고가 집약된 물건이라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오더라. 현지 공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의 자동차에 대한 애정과 개인적인 삶에 대해 들을 때 마음이 뭉클했다.” 

‘모던 실크로드’를 따라 문명은 교차한다

인도 첸나이 사원 바닥 문양 위의 현대 미니카

인도 첸나이 사원 바닥 문양 위의 현대 미니카

브라질 프레스 공장 내부(왼쪽)와 아마존 정글의 식물

브라질 프레스 공장 내부(왼쪽)와 아마존 정글의 식물

러시아 프레스 공장 시설(왼쪽)과 붉은 광장의 궁전

러시아 프레스 공장 시설(왼쪽)과 붉은 광장의 궁전

베이징 동지아오민 거리의 현대 모형카

베이징 동지아오민 거리의 현대 모형카

김용호 작가는 자동차를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가 아니다. 1990년대 상업 사진가로 시작해 각종 브랜드와 협업하며 기념비적인 패션 화보를 무수히 선보였다. 우리 시대의 명인들을 흑백 사진으로 기록한 ‘명인전’, 사람들의 ‘벗은 등’을 기록한 ‘몸’전, 물 속에 들어가 누운 상태로 연잎을 찍은 ‘피안’까지 다양한 예술 사진 작업도 했다. 7년 전부터는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협업해 로봇의 머리 위에 형광등을 단 설치 미술작품 ‘모던 보이’를 만들고 있다.

전방위 아티스트로 활약 중인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토리텔링.’ 그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는가를 함께 들려주면 작품의 의미와 가치는 훨씬 높아진다”고 했다.

스토리가 있는 사진을 찍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물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패션도 기계도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사진을 찍을 때 먼저 사진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09년에 찍은 루이비통의 광고 사진 ‘불국루비통’은 100년 전 조선 여인이 프랑스 신사와 사랑에 빠졌는데, 남자가 고국으로 떠나면서 끝내 헤어진다는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가방이 사랑의 징표로 남는다는 일종의 풍자인데, 한 대학교수가 나의 이런 작업에 ‘포토 랭귀지(photo language)’라는 명칭을 붙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 작업에는 ‘모던 실크로드’라는 주제를 담았다.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울산은 경주 바로 옆이고, 통일신라시대 뱃길을 따라 서양인들이 오가던 국제 도시였다. 경주 원성왕릉에 있는 서역인 상의 눈매와 아반떼의 헤드램프 형태가 무척 닮았는데, 이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역사의 기억이나 문화적 DNA의 산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의 첫 번째 해외 공장은 육상 실크로드의 기점인 터키 이스탄불에 세워졌고, 두 번째는 해양 실크로드의 거점인 인도 첸나이다. 그 루트를 보며 고대 문명이 전파된 실크로드를 따라 기계 문명이 퍼져나가며, 서로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단 생각을 했다.”
역사 공부를 많이 하나보다.
“패션 사진도, 자동차 사진도 수많은 사람들이 찍는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사진이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르게, 잘’ 찍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역사 공부를 하게 되더라. 한 때는 현대카드 이미지 작업을 하면서 화폐의 역사와 기호학에 깊이 빠졌고, 주역(周易)까지 공부했다.”
최근에는 자동차나 석유화학 공장 등 산업 시설을 많이 찍고 있는데.
“‘인더스트리 뷰티(Industry Beuty·기계 미학)’ 분야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특히 자동차는 현대 문명이 창조해 낸 기술과 디자인의 총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 있는데, 지극히 기능적으로 디자인 된 부품들이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데 자주 감탄한다. 하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공장이나 자동차는 인간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계에 담긴 사람들의 땀과 그 흔적을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진 말고도 동영상, 설치 작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워낙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한 큐레이터에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동영상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상업 사진과 예술 사진을 구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 안에선 구분이 별로 없다. 나무를 찍다가 제품 사진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하고, TV를 찍다가 새로운 개인 작업의 콘셉트를 구상하기도 한다. 오히려 여러 장르에 도전하는 것이 시너지를 낸다. 예를 들어 내 자동차 사진을 보고 왠지 패셔너블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수많은 패션 사진을 찍으며 몸에 밴 감각 때문일 거다.”
창의성을 깨우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어원(語源)을 파고 들어가는 거다. 일단 작업을 시작할 때 사전을 찾아본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카피 중에 ‘브릴리언트(Brilliant)’가 있었는데, 이는 ‘빛나는, 찬란한’이란 뜻도 있지만 극도로 정교한 다이아몬드 세공법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콘셉트 사진에 다이아몬드를 활용했다. 어떤 사물의 기본을 파고들다 보면,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이 나온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스튜디오 앤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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