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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했던 당 창건일 … 북,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년 더 띄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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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노동당 총비서 추대 20주년 중앙경축대회가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10만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김일성 주석(왼쪽)과 김 위원장의 대형 초상화가 보인다. [사진 노동신문=뉴시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노동당 총비서 추대 20주년 중앙경축대회가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10만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김일성 주석(왼쪽)과 김 위원장의 대형 초상화가 보인다. [사진 노동신문=뉴시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우리 당은 역사의 온갖 도전과 광풍을 짓부시(수)며 사회주의 위업을 승리에로(로) 이끄는 위대한 향도자”라고 주장했다. 창당 72주년인 이날 게재한 사설에서 신문은 “우리 당은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것이며 이 땅우(위)에 인민의 낙원, 인류의 이상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언급도 소개했다.

8일 금수산태양궁전 대대적 참배 #3대세습 정당성 부각, 도발은 없어 #연휴 평양 일대 수상한 트럭 이동 #한·미 집중감시 피한 뒤 도발 여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代) 세습을 정당화하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셈이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가부장 사회인 북한에서 당을 어머니로 부르면서도 아버지 장군님(김정일), 어버이 수령(김일성) 등 최고지도자를 당 위의 존재로 여기고 있는 만큼 당 창건 기념일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적으론 그러나 ‘조용’했다.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도발이나 중앙보고대회 등 창당 기념행사는 이날 밤까지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은 5주년이나 10주년 등 소위 꺾어지는 해에 행사를 성대히 하는데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이었던 지난 8일 행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것으로 대신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8일을 맞아 전원회의와 중앙보고대회(기념식)를 열었고 김정은과 주요 간부들이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다른 당국자는 “한·미 정보 당국이 추석 연휴 기간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예의 주시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군사옵션 사용에 부담을 느껴 숨 고르기에 들어갔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습 도발의 효과를 위해 변죽만 울리다 말았거나 집중 감시 기간이 지나면 추가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추석 연휴 직전 평양시 일대에서 미사일 발사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트럭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창당 72주년을 맞은 북한 노동당 역사는 ‘피의 역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처형한 것도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거세하면서 지도체제를 구축해 온 김일성·김정일의 연장이기도 하다.

해방 한 달여 뒤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을 받으며 북한 지역에서 당권 장악에 주력했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세력이 약했던 김일성은 당시 박헌영이나 무정 등 국내파와 연안파가 주축이 됐던 국내 공산주의 세력 다툼의 틈새를 노렸다”며 “박헌영이 서울에 조선공산당을 세우자 김일성은 북한 지역의 당 간부들을 모아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열고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이날을 당 창건 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후 미·소에 의한 군정(軍政)이 실시되자 공산주의자들이 평양으로 모였고 북한은 빨치산파(김일성), 국내파(박헌영), 연안파(김두봉), 소련파(허가이) 등의 연합체제로 출발했다. 그러나 6·25전쟁 직후 김일성이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파를 간첩 혐의로 처형했다. 허가이 역시 전쟁 직전 사망했다. 1956년 8월 있었던 종파 사건은 김일성 단독체제로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연안파였던 윤공흠 등이 주축이 돼 김일성을 몰아내려다 사전에 발각돼 김일성의 역공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대대적으로 숙청됐다”며 “67년에는 박금철·이효순 등 갑산파를, 69년에는 김창봉·허봉학 등 군부 실세를 제거하며 1인 지배체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가족들과의 투쟁, 즉 ‘백두혈통’ 간 싸움에서 이기면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70년대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의 발언권이 세지자 오진우 등 빨치산파들의 지원 속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과정에서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 등은 해외 대사로 나가 아직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또 삼촌이자 조직지도부장이었던 김영주 역시 75년 숙청됐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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