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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 향한 한국무용의 프로포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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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호 30면

[REVIEW & PREVIEW] 국립무용단 신작 ‘춘상’

발레를 미술에 비유하자면 고전발레는 구상화, 모던발레는 추상화쯤 될 것 같다. 근대 이전의 서양미술은 종교화나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초상화가 대세였는데, 스토리와 메시지를 담기 위한 그림이었다. 반면 현대의 추상화는 색과 면, 질감 등의 표현 자체로 모종의 정신성을 추구한다. 춤의 흐름도 비슷하다. 스토리에 춤이 봉사하는 고전발레에 비해 모던발레는 개념만 있을 뿐 춤 자체가 주인공이 됐다.

기간: 9월 21~24일 #장소: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문의: 02-2280-4114

그런데 본격 추상화로 가기 전 단계에 현대미술을 열어젖힌 인상주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그림은 사람이나 풍경 등 묘사 대상이 있지만 어떤 순간을 포착할 뿐, 선과 면과 색 등 그림을 이루는 요소 자체가 중요했다. 그림이 별도의 목적을 갖지 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작이랄까. 발레에도 스토리가 있지만 마임 등 구체적인 상황 전개를 생략하고 춤의 감정 표현에 집중한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드라마 발레가 있다.

국립무용단의 신작 ‘춘상(春想)’(배정혜 안무·정구호 연출·9월 21~24일)도 ‘네오클래식 무용극’을 지향했다. 국가브랜드 공연에 선정되기도 했던 대표적인 무용극 레퍼토리 ‘춤, 춘향’(2002)의 모티브를 살린 무용극이지만, ‘봄에 일어나는 다양한 상념’이라는 제목처럼 무대는 퍽 추상적이다. 스토리는 있지만 만남·환희·갈등·이별·좌절·언약 등 8가지 감정을 전면에 내세워 나열식으로 풀어가며 각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춤을 고민했다. 송범 스타일의 고전적인 무용극과 현대무용에 가까운 한국창작춤 사이에서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어디쯤이랄까.

그간 한국무용 현대화 작업에서 미니멀리즘 솔루션을 제시해온 정구호 연출은 극무용에서도 스타일을 고수했다. 2층 회전무대를 사용한 화면분할 효과와 아이유·어반자카파·정기고 등 대중가요 사용이 대극장 쇼뮤지컬 풍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구호 미니멀리즘은 여전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택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반듯한 구조물이 반 바퀴 돌 때마다 조명과 의상 색조가 바뀌며 각 장의 감정을 똑떨어지게 구분했다. 가사까지 삽입된 가요 베이스 음악도 튀는 감 없이 70대 안무가의 춤과 잘 섞였다. ‘한국 창작춤의 건축가’ 배정혜가 젊은 취향에 맞춰 속도감 있게 재건축한 새로운 춤사위에는 우리 춤 특유의 호흡도 건재했다.

하지만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정구호가 스토리텔러는 아니었다. 춤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라지만, 부모의 반대로 이별했다 재회한다는 뼈대만 있을 뿐 디테일이 제거된 이야기는 개성적인 ‘극’이라기보다 보편적인 러브스토리의 원형에 가까워 보였다. 바로 드라마투르기의 빈 자리다. 네오클래식 드라마발레 ‘오네긴’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등도 대표적인 장면의 감정을 극대화해 보여주긴 했지만 구체적인 갈등구조와 최소한의 개연성이 담보됐기에 ‘드라마’의 자격을 얻었다. 춤으로 표출되는 감정에 관객이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러브 스토리를 표방한 무대에 에로티시즘도 실종됐다. 춤이란 몸으로 부딪혀 성립하는 것이기에 태생적으로 에로티시즘을 내포한다. 그런데 사랑의 2인무로 중심을 잡아줘야 할 극무용에 만남의 설렘을 제외하곤 온통 혈기 넘치는 군무가 지배했다. 졸업 파티로 시작해 언약 파티로 끝나는 흥겨운 축제 분위기 속에 하늘거리는 플리츠스커트가 보기 드물게 한국무용수의 다리를 훤하게 드러냈을 뿐, 클라이맥스라 할 재회 장면에도 짜릿한 2인무가 없었다. 정옥희 성균관대 무용과 겸임교수는 “청춘남녀 사랑 묘사에 섹슈얼리티가 거세됐다”면서 “성적 끌림이 여성의 섹시댄스로만 진부하게 보여질 뿐 정작 주인공들의 사랑 장면에선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첫날 밤 장면을 잘 살린 전작 ‘춤, 춘향’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심플하고 순수한 무대의 미덕도 작지 않았다. 공연 후 주요 무용수들의 사인회에 유례없이 길게 늘어선 어린 관객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다. “한국무용을 싫어하던 젊은 친구들이 이 작품을 통해 한국무용을 즐기게 됐으면 좋겠다”던 안무가의 바램 그대로다. “최근 방송된 드라마 ‘학교’를 보는 듯 풋풋한 느낌이 좋았다”는 이도 있었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도 이 무대를 ‘청소년을 위한 댄스컬’로 정의했다. “스토리·음악·춤동작·무대…, 모든 게 젊다. 배정혜의 우아한 춤사위는 스윙과 만나 경쾌해졌고, 정구호의 미니멀한 디자인은 수채화처럼 더 투명해졌다”는 게 그의 평이다. 최신 가요를 앞세우고 산뜻한 미장센과 젊은 춤으로 무장한 이 무대의 타겟은 명확하다. 남녀노소 모두를 만족시키는 무대란 어차피 없는 법. 10대 관객을 향한 한국무용의 적극적인 프로포즈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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