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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듯이, 먹는 것도 그렇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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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호 28면

강혜란의 그 동네 이 맛집 <8> 옥인동 옥인피자

 느리게 걷는 것보다 더 도시를 만끽하는 방법이 있을까. 실핏줄처럼 골목길이 퍼져있는 경복궁 서쪽, 서촌이라 불리는 이곳에선 더욱 그렇다. 그 중 옥인길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가 하숙했던 골목이자(누상동 9번지), 겸재 정선이 ‘장동팔경첩’에 정취를 묘사한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2013년 남정 박노수 화백의 자택을 재단장한 박노수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인근 윤동주문학관과 이상의 집을 엮은 도보 관광코스가 사람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한옥을 개조한 이탈리안·프렌치 레스토랑, 와인바, 모던 한식당들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옥인피자 #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길 26(옥인동 155) #전화번호: 02-737-9944 #영업시간: 평일 오전 11시30분~오후 9시 #(브레이크타임 오후 3~5시, 일요일 휴무) #주차: 불가

2014년 3월 문 연 ‘옥인피자’는 그 중 선두주자에 해당한다. 지금은 같은 건물 커피숍 ‘서촌산책’, 최근 이름을 바꿔 오픈한 프렌치 레스토랑 ‘윌로뜨’, 수제 소바집 ‘노부’ 등 개성 있는 맛집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오픈 때만 해도 생뚱맞은 위치였다. 2012년 문 연 남도분식 외엔 세탁소·미용실·쌀집 등 토박이 가게들만 모인 골목이었다.

노민호(38) 대표는 그 ‘낡은 풍경’을 사랑했다. 중랑구 면목동 단독주택에서 조부모까지 함께 살았던 유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움이 있었다. 아내인 유지은(36)씨는 전혀 달랐다. ‘원스톱생활’이 가능한 반포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신혼집을 꾸리는 걸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동네에 살 수 있을까” 했던 생각은 첫 집을 보고 바뀌었다.  나지막한 지붕 아래 작은 마당이 있는 집.  대문만 나서면 인왕산의 사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곳에서 ‘우리 식의 삶을 살아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처음엔 음식점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신혼집으로 구했다가 ‘집도 넓은데 테이크아웃 피자나 만들어 팔아볼까’ 하다가 판이 점점 커진 거예요. 오빠가 동탄에서 피자가게를 할 때 거들었던 경험만 믿었어요. 대신에 남들이 하는 것 말고 우리가 매일 먹어도 좋을 피자를 연구했지요.”

폐가에 가까웠던 구옥의 서까래를 드러내고 구석구석 페인트칠·못질을 했다. 혼수 대신 업소용 냉장고·가스 오븐을 들였다. 처음엔 침실로 쓸 방 하나는 남겼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이내 모든 공간에 테이블을 놔야 했다. 지금은 바 좌석 포함해서 총 20여 석 규모. 직장까지 작파한 아내가 전업 주방장이고 프리랜서 겸업 남편은 홀서빙을 책임진다. 살림집은 인근에 다시 구했다.

메뉴판에 적힌 ‘조금은 느리지만 건강하게’라는 말처럼, 피자는 한참 만에 나왔다. 이 집에 오는 손님 90%가 주문하는 단호박 피자다. 노릇노릇 도우 두 장 사이에 각종 토핑이 들어있는 일종의 퀘사디아 같은 형태다. 노랗게 삐져나온 호박소스가 행여나 흐를세라 손바닥으로 받치고 깨물었다.

어렸을 때 동네 텃밭엔 넝쿨 호박이 흔했다. 엄마가 큰 솥에 쪄낸 호박 속을 숟가락으로 푹푹 긁어내 뭉근히 끓여주신 죽은 설탕 없이도 단맛이 났다. 그 호박죽의 기억이 지금 목구멍을 따스하게 적신다. 부부가 일주일에 한 번 경동시장에서 사오는 단호박(품종 아지헤이)에다 생크림·우유 등을 첨가해 매일 새벽에 만드는 소스다.

또 다른 인기메뉴는 알프레도 머쉬룸 피자. 양송이·느타리·팽이버섯 등이 쫄깃한 식감을 내 마치 도우로 감싼 크림 파스타를 먹는 듯하다. 피자 종류는 총 5가지. 매콤한 맛을 내는 바비큐치킨과 포테이토 등 2가지와 담백한 맛 3가지를 교차 주문해 즐기면 좋다. 신선한 푸성귀가 한가득인 샐러드도 2종류. 다른 식사메뉴 없이 오직 피자로만 승부한다.

“도우에만 집중해도 어려워서요. 보통 반죽하고 상온에서 1차로 30~40분 뒀다가 저온 발효를 24~30시간 하는데,  그날그날 습도와 밀가루 상태 등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거든요. 과발효되면 그대로 폐기해요. 대형 유통업체에서 식재료 받아서 하면 더 싸고 편하겠지만 그러면 다른 데랑 다를 게 없어지잖아요.”

나폴리 피자 장인인증을 받은 피자집이 늘어나고 또 한쪽에선 편의점 즉석 피자가 식사 대용으로 인기다. 이른바 이태리 정통도 아니고 간식으로 만만한 ‘가성비 피자’도 아닌데 4년 차를 맞은 옥인피자는 계속 단골을 늘려가는 중이다.

“둘 다 전문 요리인 출신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게 피자의 정통인지 아닌지 깊이 고민 안 해요. 그저 피자라는 형태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속 부대낌 없이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목표죠. 오히려 우리 음식을 통해 피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요.”

하기야 피자가 날 때부터 정크푸드였을 리는 없다. 지구촌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정성으로 반죽하고 토핑해서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일용하던 양식이, 넓어지고 빨라진 세계 덕에 한반도까지 와서 간편식의 대명사가 됐다. 이젠 그렇게 급하게 먹을 필요가 있느냐, 조금 느리게 가도 되지 않느냐고 옥인피자가 묻는다. 가게를 나와 인왕산 구름자락 아래 필운대로로 걸어갔다. 차량 과속방지턱 앞에 큼지막하게 ‘천천히’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글·사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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