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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23)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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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냉장고가 죽었다. [사진 freeimages.co.uk]

우리 집 냉장고가 죽었다. [사진 freeimages.co.uk]

내가 없는 새 냉장고가 죽었다.

냉장고가 사망하면서 바뀐 내 일상 #그날 먹을 것만 사 버리는 음식 줄고 #많이 사는 버릇 고쳐지고 매일 장 봐

며칠 집에 다녀왔다. 이젠 제법 도시 공기에 숨이 막히고, 교통체증에 어지럼증이 생길 정도로 시골 사람이 되어서 빨리 포월침두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사이 냉장고가 사망하신 것이다.

놀자고 오는 건지, 먹자고 오는 건지 친구들은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사 들고 온다. 왜 이렇게 많이 사 왔느냐고 핀잔을 주면 “냉장고 있는데 뭔 걱정이야. 두고두고 먹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꼭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러 나가 며칠 먹어도 못 먹을 분량의 음식을 잔뜩 사고는 “못 먹으면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지 뭐.” 또 텃밭에서 딱 한 끼 분만 따오면 되는데, 끼니때마다 가는 게 귀찮아 며칠 분의 채소를 따다 냉장고에 맡긴다.

일주일만의 컴백을 죽어버린 냉장고가 반갑게 맞는다. 차가워야 마땅할 따뜻한 냉장고 속의 음식들이 멀쩡할 리 없다. 장류를 제외한 속에 있던 거의 모든 음식이 다 썩었다. 썩은 음식 내다 버리고, 냄새 밴 냉장고를 청소하는 데 무려 네 시간이 걸렸다.

냄새 밴 냉장고를 청소하는 건 고역이다. [중앙포토]

냄새 밴 냉장고를 청소하는 건 고역이다. [중앙포토]

처음엔 입에서 욕이 나왔다. 요량도 없이 잉여의 음식을 싸 들고 왔던 친구들에게, 고픈 배를 핑계로 먹거리 사냥에 몰두했던 스스로에게, 냉장고 만든 회사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두 시간쯤 지나자 욕은 차츰 반성으로 바뀌고 결국 마지막 설거짓감을 끝냈을 때 내 마음은 냉장고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찼다. 썩은 내 나는 네 시간 동안, 나는 고행을 한 게 아니라 향기로운 수행을 한 것이다.

냉장고는 나를 위해 죽었다. 냉장고에 넣어두어서 신선한 것이 아니라, 신선한 재료를 사거나 따서 바로 먹는 게 신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죽었다. 그냥 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깨우치니까 이 지독한 썩은 내로 깨우치라고 제 속을 다 썩혀버리며 죽은 것이다.

올 봄에 산에 들에 핀 나물들로 밥상을 차렸다. 땃두릅, 가죽나무순, 엄나무순, 두릅. 냉장고 들르지 않고 밥상에 바로 놓인 건강한 먹거리다. [사진 조민호]

올 봄에 산에 들에 핀 나물들로 밥상을 차렸다. 땃두릅, 가죽나무순, 엄나무순, 두릅. 냉장고 들르지 않고 밥상에 바로 놓인 건강한 먹거리다. [사진 조민호]

홀가분해진 냉장고 없는 내 하루 

냉장고가 없으면 내 하루는 어떻게 바뀔까? 쌓아둘 수 없으니 그날 그날 먹을 것들만 사겠지. 자연스럽게 싱싱한 재료를 먹으니, 냉장고 뒤져 오래된 재료들로 편하게 한 끼 해결하고 난 다음의 불편한 뱃속은 사라지겠지. 버리는 음식도 줄어들 거야. 많이 사는 버릇도 고쳐질 거야. 매일 장 보러 나가고, 텃밭에 들러야 되니까 덤으로 몸도 건강해지겠지.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있나.

“땡큐,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냉장고가 숨이 넘어가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간다. 너 살리자고 나는 가니, 부디 잘 먹고 잘 살아라~ 꼴까닥!” 숨이 넘어간 냉장고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 놔~ 어차피 버릴 건데 괜히 4시간 동안 닦았잖아.”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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