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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장관 30% 시대에 … ‘모성’만 강조하는 36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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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내 삶을 바꾸는 개헌 ① 생활개헌이 필요한 이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더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이 지난해 11월 해외 15개국의 7200명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문화 강국’(평점 3.83점, 5점 척도)이란 항목에서 가장 점수가 높았다. 그 다음이 ‘경제적 선진국’(3.77), ‘호감이 가는 국가’(3.67), ‘우호적 국가’(3.61) 등이었다. 한국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한식(12.5%), K팝(12.1%), IT산업(10.2%), 드라마(9.9%) 순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87년 헌법’ 의식 #‘민족문화 창달’ 조항, 한류 못 담고 #소비자는 ‘알 권리’ 대신 계도 강조

한식, K팝,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는 한국을 뛰어넘어 지구촌에 파고든 지 오래다. 하지만 헌법 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를 뚫는 한국 문화의 저력을 민족문화의 창달로 한정했다.

1987년 헌법에는 이런 ‘낡은 의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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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장관급 19자리(국가보훈처장 포함)에 여성을 임명해 여성 장관 30%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헌법 36조 2항(“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은 여성을 아직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어머니로 보고 있다. 여성단체들이 “여성을 가족 내 역할로만 보려는 대표적 조문”으로 꼽고 있는 조항이다.

국가는 ‘갑’, 국민은 시혜의 대상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헌법 124조에는 “국가는 건전한 소비행위를 계도하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비자는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지닌 경제주체다. 살충제 계란 파동, 생리대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정보에 대해 ‘알 권리’를 가져야 하는 시대다.

하지만 헌법에 알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 권리는 헌법재판소가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을 근거로 해석상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헌법을 바꾸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고 말한다. 한 교수는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을 막을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53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면서 근거를 마련했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던 최저임금제가 87년 헌법 32조(“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에 처음으로 명시되면서 노동 계층의 안전판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국민 삶을 바꾼 ‘생활 개헌’의 대표적 사례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대표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문장 하나만 헌법에 들어가도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라며 “관청이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갑자기 내 집 앞길을 파헤치는 식의 행정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박성훈 기자 park.seong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