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52) 귀면암 유민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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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며칠을 굶다시피 하며 용아장성과 천화대를 혼자 등반하고 양폭산장에 닿아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지어 막 첫숟가락을 뜨려는 순간, 남루한 차림새의 어떤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형씨, 숟가락 좀 빌려줄 수 있겠어요?"

숟가락의 용도는 우선 밥 먹는 것이지만 소주병을 따는 데도 요긴하게 쓰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쥐고 있는 보따리 속에 소주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숟가락을 빌려줬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내의 입에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이 세 번이나 튀어나왔을 때 뭔가 감을 잡았어야만 했다. 내 숟가락을 낚아채 듯 받아쥐자마자 사내는 뚜껑 딸 소주를 꺼내지는 않고 내 발 밑에서 밥냄새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코펠을 냅다 가로채더니 그야말로 눈깜박할 새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망연자실!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보통 "어!"소리를 한번만 내지르는 버릇이 있는 나는 이땐 "어! 어! 어!"라고 잇따라 내뱉었다. 첫번째 "어!"에서 세번째 "어!" 소리를 낼 때까지 5초 정도 걸린 것 같았는데 그 사이 사내는 코펠을 깨끗하게 비운 뒤 숟가락을 내던지고 귀면암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하산? 천만에 그건 도망이었다.

다음날 허기에 지친 발걸음을 끌고 양폭산장을 떠나 귀면암의 고갯마루로 올라섰다. 그곳에서 웬 사내가 등산객을 상대로 음료수를 파는 난전을 펴놓고 있었다. 전에는 못 보던 풍경이었다. 난전을 스쳐지나는데 그 사내의 시조풍 사설이 들려왔다.

"저기 저 젊은이 뒤돌아 나를 보소. 자기가 먹을 밥을 남한테 거저 주고 제 굶고 남 먹이니 너무 귀한 사람일손. 내 그대의 허기를 설악의 정기로 채워주리니…."

나를 부른 그 난전의 사내가 바로 전날의 '숟가락'이었는데 뒷날 '귀면암 도사'로 불린 유만석씨였다.

귀면암의 동쪽 기슭에 토굴을 하나 파서 그 속에서 살았던 유씨에게 신통력이 들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룻밤새 머리카락을 까만색에서 흰색으로 바꾼다지. 둔갑술을 한다네."

"지리산 허우천 도사를 만날 때는 축지법으로 하루 밤 만에 설악에서 지리까지 내달린다네."

1982년의 어느 겨울날 귀면암 토굴로 찾아가 그 신통력에 대해 묻자 유씨는 소년처럼 깔깔댔다.

"둔갑술? 사실이지. 염색약 바르면 되니까."

"축지법? 그건 아냐. 이 땅이 왜 이렇게 좁아졌는지 알아. 옛날 도사들이 서로 빨리 가려고 축지법을 써 땅을 좁혀 놓았기 때문이지. 원상회복시키는 확지법을 몰랐던 게야. 그래서 요즘 내가 확지법을 연구하고 있어. 그게 뭐냐고? 음, 그건 말야. 천천히 그러니까 빨리 가려는 욕심을 버리는 법이야. 천천히 움직이면 땅도 마음도 넓어져."

우리의 확지법 도사는 86년 여름 설악에 폭우가 쏟아진 날, 귀면암 아래 계곡을 건너려다 조난당한 여러 여대생을 구해냈으나 정작 자신은 급류에 휩쓸려 아주 떠내려가고 말았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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