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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세상] “풍구아 마초” … 탄자니아인 94명 눈뜨게 한 마법의 주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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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비전케어 아이캠프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한 리삼하메디(안구보호대 착용)가 수술 전과 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송승환 기자]

비전케어 아이캠프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한 리삼하메디(안구보호대 착용)가 수술 전과 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송승환 기자]

“엔(N), 에프(F), 엘(L) … 와우, 보인다!” 의자에 앉아 시력검사를 받던 리삼 하메디(40)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형제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형제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탄자니아서 인술 펴는 의료팀 #국제실명구호기구 ‘비전케어’ #한국인 의사 넷 포함 13명 파견 #4일간 백내장 수술 등 무료 진료 #안경 350개 챙겨가 맞춤 제작도

탄자니아 동부의 키바하 지역에 사는 하메디는 1년 전부터 시력이 점점 나빠지더니 부축 없이는 혼자 걷지 못할 정도가 됐다. 동생 산토마 하메디(35)는 “당뇨 합병증이라고 생각해 형이 안과 진료를 받은 적이 없다. 형은 시력을 잃은 뒤 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았다”고 했다.

하메디가 시력을 잃은 건 백내장 탓이었다. 그는 지난달 30일 ‘툼비 병원’에서 한국 의료진의 무료 수술을 받았다. 뿌옇게 상한 수정체를 빼내고 새 인공 수정체를 넣는 데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실명예방위원회(IAPB)에 따르면 전 세계 약 73억 명의 인구 중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약 2억1700만 명이다. 그중 3600만 명이 실명 상태다. 시각장애인의 90%는 저소득 국가와 중간소득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인구 중 시각장애 환자의 비율이 5%를 넘는 나라가 많다.

앞 못 보던 40대 “N, F, L … 와우, 보여요”

한국인 안과 의사들은 필요한 표현의 현지 발음을 수술대 옆에 붙여두고 환자와 소통했다.[송승환 기자]

한국인 안과 의사들은 필요한 표현의 현지 발음을 수술대 옆에 붙여두고 환자와 소통했다.[송승환 기자]

시각장애를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 질환은 백내장(39%)이다. 눈에서 렌즈 역할을 하는 수정체가 뿌옇게 혼탁해져서 시력이 감소하는 질병인데, 방치하면 실명에 이를 수 있다. 혼탁해진 수정체를 빼내고 인공 수정체로 교체하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 이처럼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시장장애를 ‘피할 수 있는 실명’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 시작장애인 중 80%가 피할 수 있는 실명에 해당한다.

하지만 안과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일이 평생 한 번도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저소득 국가에는 안과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약 5000만 명이 거주하는 탄자니아의 경우 안과 의사는 단 50명이다. 모잠비크(인구 2000만 명)에는 8명, 말라위(인구 1400만 명)에는 6명의 안과 의사가 있다. 탄자니아와 비슷한 인구 규모인 한국에는 약 3000명의 안과 전문의가 있다. 안과 병원은 주로 도시에 있고 진료비도 비싸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도 많다. 안과 병원을 방문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안과 질환을 예방하거나 시력이 나빠지면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낮다. 이런 이유로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실명예방위원회는 2020년까지 피할 수 있는 실명의 원인 질환을 현재의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비전 2020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95개 회원국과 60여 개 기관과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현지 의료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과의사 안대휘씨가 백내장 수술을 진행하는 모습. [송승환 기자]

현지 의료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과의사 안대휘씨가 백내장 수술을 진행하는 모습. [송승환 기자]

그중 하나인 비전케어는 명동성모안과 김동해 원장이 설립한 국제실명구호기구다. 2002년 파키스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8개국에서 256차례 아이캠프를 열었다. 아이캠프는 피할 수 있는 실명의 원인 질환을 줄이기 위한 구호 활동이다. 한번 캠프가 열릴 때마다 평균 80~100명의 환자를 수술하고 약 300개의 안경을 지급해 왔다. 김 원장은 “무료 안과 진료와 수술에 그치지 않고 현지 의료진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현지 또는 국내외에서 세미나를 열고 이들을 초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탄자니아 키바하 지역으로 비전케어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아이캠프를 차려서 탄자니아 주민들에게 무료로 안과 진료와 수술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안과 의사 4명, 간호사 4명, 안경사 1명, 자원봉사자 2명, 행정 간사 2명이 미국·영국·한국에서 찾아왔다. 캠프는 키바하 지역 거점 병원인 ‘툼비 병원’의 안과 외래진료실과 수술실에 꾸려졌다.

탄자니아에 있는 툼비병원 안과 외래진료실에서 근시 환자의 시력 검사를 하고 있는 안경사 최영찬씨. [송승환 기자]

탄자니아에 있는 툼비병원 안과 외래진료실에서 근시 환자의 시력 검사를 하고 있는 안경사 최영찬씨. [송승환 기자]

첫 진료를 시작한 지난달 28일 오전 8시 툼비 병원의 안과 외래진료실 앞 복도엔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눈을 떠도 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 환자들이었다. 진료를 받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번호가 불리면 1층 진료실 복도에서 2층 수술대기실로 천천히 이동했다. 대부분 신체의 운동 능력은 문제가 없지만 눈앞이 흐려 빠르게 걷지 못하고 부축 없이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수술실에선 4명의 한국인 안과 의사가 두 개의 수술대를 번갈아 맡았다. "풍구아 마초, 앙갈리아 무앙가(눈 뜨세요, 불빛을 보세요).” 한국인 의사들은 수술대에 오른 환자들에게 현지어인 스와힐리어로 이렇게 말하며 수술을 진행했다.

나흘간 수술받은 환자는 총 94명이었다. 하루 평균 23.5명씩 수술한 셈이다. 툼비 병원의 안과 의사 응자바는 “탄자니아 안과 의사가 백내장 수술 1건을 할 때 한국 의사는 5~6건을 한다. 놀라운 수술 실력이다”고 말했다.

현지 병원이 자체 진료하게 기술 전수

수술실 밖에서는 안경으로 시력을 교정해 밝은 시야를 얻고 돌아가는 환자도 많았다. 미국 시카고에서 안경점을 운영하는 안경사 최영찬(64)씨는 탄자니아에 오면서 환자들에게 기부할 안경 350개를 챙겨 왔다. 그는 환자의 시력을 검사해 도수별로 미리 만들어 온 안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국제실명예방위원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약 11억 명이 안경을 구할 수 없어 근시를 교정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아이캠프 마지막 날인 지난 1일엔 나흘간 수술 받은 환자가 모두 병원에서 수술 후 경과를 점검했다. 안구보호대를 떼고 눈을 닦은 뒤 시력검사를 한 환자들은 글자가 보이자 박수를 치고 동료와 포옹했다. 한국 의료진을 만나면 “아산테(고맙습니다) 코리아”를 외치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비전케어의 아이캠프는 탄자니아 현지 의료진이 한국 의료진의 기술을 전수받는 장이기도 했다. 아이캠프 기간에 탄자니아의 무힘빌리국립병원 안과 전공의들은 한국인 의사 옆에서 진료와 수술을 지켜보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안과 의사 김재윤(35)씨는 “비전케어의 아이캠프는 장기적으로 현지의 거점 병원이 안과 역량을 강화해 자체적으로 주민들에게 예방·진료·수술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의료봉사 간 탄자니아는 …

동아프리카에 있는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은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통합해 생긴 나라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4.3배고 인구는 약 5000만 명이다. 북부에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과 세렝게티 국립공원 등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있다. 현지어는 스와힐리어지만 영어도 공식어 중 하나다. 법률상 수도는 ‘도도마’지만 ‘다르에스살람’이 실질적인 수도 기능을 하고 있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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