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치지도자라면 국익 위해 선거 패배까지 감수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개혁은 모든 정치인들의 ‘구호’지만, 실제로 개혁을 실천하고 성공하는 이는 드물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개혁을 꿈꾸는 정치인들의 ‘전형(典型)’으로 꼽힌다. 그는 독일 통일의 후유증이 누적돼 독일이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던 1998년 집권해 7년간 적녹연정(사민당(SPD)-녹색당 연립정부)을 이끌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어젠다 2010(Agenda 2010)’으로 불리는 강력한 사회ㆍ노동ㆍ연금 개혁을 통한 국가 대개조였다. 과도한 사회보장 부담을 줄이는 한편 해고요건 완화와 감세 등을 통해 독일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이었다. 그는 시대의 과제였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선거에서 패배해 정권을 내줬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오늘날 독일 재도약의 토대가 됐다. 그가 지금도 ‘독일 개혁의 기수’로 꼽히는 이유다.

김영희 대기자, 슈뢰더 인터뷰 #강력한 노동개혁인 ‘어젠다 2010’ #실각 빌미 됐지만 지금도 또 할 것 #반대 무릅쓰고 개혁적 정책 관철 #효과는 3~5년 지나서 나타나 #나의 위안부 피해자 방문과 기부 #일본에 어떤 메시지 된다면 좋을 것 #한국,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북과 대화보다 좋은 방법 없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오른쪽)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9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대담을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오른쪽)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9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대담을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 문명국가로의 귀환』 한국어판 발간에 맞춰 한국을 찾은 그는 9일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 지도자는 선거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국익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국가이익은 권력의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80분간 이어진 대담에서 슈뢰더는 독일과 분단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김영희=오늘(11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을 방문해 한국어판 자서전의 인세 중 1000만원을 기부한다고 들었다. 이번 방문이 일본에 대한 상당히 강한 메시지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나?

게르하르트 슈뢰더=일본에 어떤 메시지가 전해진다면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은 나치가 행한 잔학한 과거사를 충분히 토론하고 반성하고 과거 청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역사적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관심 표명이다. 한국을 자주 방문해 한국인과 한국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 이런 제스처를 하는 것에 있어서 하등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고,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현직 총리가 아니지만, 설령 현직 총리라 해도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는 측면에서 외교적 관례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련기사

김=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무한정 사죄를 하고 있다. 일본은 아니다. 일본은 왜 독일처럼 못한다고 생각하나?
슈뢰더=아마 이것은 일본식 사고방식(mentality)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의 범죄행위 참여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후세대가 통감하고 책임질 필요가 있다. 독일에선 독일이 과거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후세대가 반복하지 않도록 기억시키고 배우고자 한다. 후세대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역사적으로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
김=독일의 후세대들은 책임을 지는데 기꺼이 동의한다는 건가?
슈뢰더=그렇다.

김=총리께서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문명사회의 실현을 정치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문명사회란 무엇인가?
슈뢰더=문명사회라는 것은 선거라는 프로세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다. 예를 들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 정치나 정부에 반해 시위할 수 있는 사회, 자유로운 언론이 여론형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사회가 내가 생각하는 문명사회의 핵심이다.

김=총리께서는 권력의지를 가진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사민당(SPD) 내에서도 반대를 하고, 사민당의 최대 지지기반인 노동조합이 극렬히 반대하는 과격한 노동·연금개혁이 포함된 ‘어젠다 2010(Agenda 2010)’을 추진했다. 그 결과 독일의 심각한 통일 후유증을 해결했지만, 권력은 잃었다. 지금이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슈뢰더=나는 오늘 다시 결정 내려도 동일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얻은 권력이고, 정치 지도자라면 그러한 권력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가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국가이익은 권력의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 지도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권력을 포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책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정책이 국익과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선거에서 패배하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정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우선순위를 꼽으라면 국익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이 정당의 이익 또는 자신의 권력의지가 될 것이다.
김=민주주의를 한다는 국가에서도 그러한 우선순위를 거꾸로 보는 지도자들이 많은게 현실이다.
슈뢰더=(웃음) 맞는 말이다.

김영희 대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영희 대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사민당에서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어젠다 2010에 대한 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대를 어떻게 극복했나?
슈뢰더=네덜란드의 개혁 프로세스(1982년 바세나(Wassenaar) 협약)가 좋은 예다. 노·사·정이 모여 타협안을 만든 이 네덜란드 모델을 참고해 시도한 것이 독일의 노사정 위원회, ‘노동을 위한 동맹(Bündnis für Arbeit)’이란 것이었다. 노사정 3자가 모여 컨센서스를 만들어보자, 개혁정책 프로세스에서 3자가 합의를 해보자는 시도였다. 그런데 사용자 단체도, 노조도 정부에게 요구만 하지 타협할 생각을 안 하더라. 정부가 국익을 위해서 양측이 타협하지 못하는 것을 관철시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부가 그것을 한 것이다.
김=어젠다 2010의 성과를 가장 크게 누리고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인 것 같다.
슈뢰더=역설은 아니지만 좀 억울하긴 하다 (웃음). 정치 지도자는 때로는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 정책을 관철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결정의 긍정적인 결과는 3~5년은 지나야 나타난다. 선거는 대개 그런 성과가 나오기 전에 실시된다. 그러면 개혁 정책을 시도한 정치가는 낙선할 수 있다. 내가 그런 경우다.

김=한국의 문재인 대통령도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아가면서 사회복지, 노동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
슈뢰더=조언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독일에서 ‘공개적 조언(Ratschlag)’은 조언(Rat)보다는 구타(Schlag)에 가깝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 문 대통령을 잠깐 만날 기회가 있는데, 그때 만일 내게 개인적 조언을 구한다면 해줄 수는 있다.

김=기민당(CDU)의 메르켈 총리가 2005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데 사민당이 잘 못해서 그런가, 메르켈이 잘 해서 그런가?
슈뢰더=메르켈 총리가 일을 아주 잘 한다. 그래도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기 마련이다. (웃음)
김=서유럽에서 독일 SPD를 포함한 중도좌파 정당들이 저조하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가 황혼을 맞은 것인가?
슈뢰더=유럽 중도좌파의 약세에 대해선 경제적인 역량(economical competence)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좌파 정당들이 사회분배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분배할 것을 생산하는데 대한 집중적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김=막스 베버는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로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 세 가지를 꼽았다. 총리께서 생각하는 정치인의 조건은?
슈뢰더=열정과 책임의식은 필수적이다. 자기가 하는 것(정치)에 대한 열정과 책임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세 번째 균형감각은 독일어스러운 표현으로는 ‘균형 잡힌 안목’인데, 나는 그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정치는 소통이 중요하고 정치가의 능력으로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김=총리 시절 어떤 원칙 아래 소통했나?
슈뢰더=독일에선 통치자에게는 빌트(독일 대중지), 빌트암존탁(빌트의 일요판), 글로체(Glotze·TV만 보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 중 안방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 TV였다. 첫째 자기가 가진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갖고 미디어에서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두 번째는 TV에 등장할 때 말쑥한 옷차림이 중요하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다 잊고 내가 어떤 넥타이를 맺는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TV는 아주 잔인한 미디어다. 절대 TV에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 자기 확신이 드는 것, 진실만 얘기해야 한다. 자기 확신 없는 얘기, 진실이 아닌 얘기를 하면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김영희 대기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김영희 대기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어떻게 평가하나?
슈뢰더=트럼프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모른다. 하지만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라고는 말 못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당선 당시를 회고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영화배우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레이건은 미국 역사상 성공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꼽힌다. 레이건은 참모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트럼프처럼)참모들 얘기는 듣지도 않고, 2~3일에 한번씩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트위터로 내던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미국처럼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 지도자라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야 하는데 트럼프는 그렇지 못하다.

김=나라마다 4차산업에 대비하고 있다. 독일은 AI의 실용화를 포함한 4차산업 혁명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슈뢰더=독일에선 4차산업을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이라고 부른다. 노·사·정과 학자들 4자가 모두 들어와 새로운 종류의 생산에 대해 논의하고, 새로운 종류의 생산이 가져올 여파를 논의하고 연구한다. 오래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 아마도 미래에는 최초 직업교육으로 얻게 된 직장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직업교육으로 일자리를 얻어도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교육, 소위 말하는 평생교육이 일상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 종사자는 전기차 시대를 맞아 기술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
AI 시대를 낙관한다. 인간의 두뇌가 어마어마한 다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100% 대체하는 인공지능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인간의 뇌는 기능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술과 문화가 속하는 감성적인 부분이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창의성과 다양성,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상상 능력, 느낌, 감성 등을 완벽하게 아우르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두뇌를 가진 인공적인 인간(신인류)이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그러하길 바란다.

김=독일 통일이 부럽다. 한국과 독일의 사정은 다르지만 통일에 관해 한국이 독일 통일에서 배울만한 교훈은?
슈뢰더=독일의 통일 상황과 현재 한국의 상황은 너무 다르다. 당시 유럽에서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찾는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필연적으로 자유시장 경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군사적인 대결이 첨예화되고 있고, 이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평화로운 해결책을 북한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런 핵무기를 자기 민족을 파괴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는 정권이다.
이걸 막을 수 있는 조건이 주변 강대국과의 공조라고 생각한다. 미·중·러가 북한에 대해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압박을 가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은 현재 중국에 대해선 경제적인 압박을, 러시아에는 고립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공동 보조가 어려운 상황이다. 주변 강대국들이 북한에 대해 공동의 압박을 가할 때 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도 전제조건은 있어야겠지만 대화를 하려는 기본원칙을 갖는 것이 맞다고 본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대화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김=친구인 푸틴에게 김정은의 도발 견제를 요청할 수 없나?
슈뢰더=현재 한 가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의 정신은 경제협력을 통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와 한국이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한다면 성공적으로 잘 될 것이라고 본다.

정리=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게르하르트 슈뢰더 누구인가?

게르하르트 슈뢰더(73)는 변호사와 연방하원 의원, 니더작센주 총리를 거쳐 제7대 독일 연방총리(1998~2005년)를 지냈다. 총리 시절 ‘어젠다 2010’으로 불리는 사회 개혁을 단행해 독일 경제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개혁안에 대한 저항으로 2005년 7월 신임투표를 치른 끝에 패배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6년부터 독일 에너지기업과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이 합작 운영하는 노르트스트림의 감독이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