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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조인 종이 향수에 마음이 촉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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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호 22면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68>프루스트 효과와 파피에르 다르메니


대형 쇼핑몰이 동네 가까이 문을 열었다. 신문엔 큰 규모와 화려한 시설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젠 부산 해운대나 동대구역에 들어선 멋진 백화점에 보내던 부러움의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가보고 싶었다. 친구가 이곳에 새 매장을 냈다고 하니 마침 잘 됐다.

새 매장은 널찍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마무리를 뽐냈다. 진열된 디자인 상품이야 예전과 다를 게 없다. 촉촉하고 상쾌한 숲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코끝을 살짝 스쳤을 뿐인 향의 효과는 꽤 컸다. 왠지 매장에 오래 머무르고 싶고 진열된 물건이 더 좋아 보인다. “새 매장의 컨셉트를 향이 풍기는 격조 높은 공간으로 삼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전 매장에 비해 늘어난 매출이 “향의 효과 때문”이라며 좋아했다.

향기를 이용해 물건을 더 많이 파는 향기 마케팅은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커피집은 문 앞에서 구수한 커피 향을 흘리고 음식점은 음식 냄새를 일부러 풍기지 않던가. 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냄새까지 더해 식욕을 자극하는 방법은 효과가 크다. 지나치려던 발걸음을 돌려 커피와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든 동인은 바로 향이다.

유명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실내 분위기와 어울리는 향의 쾌감을 기억하는지. 특정 향의 지속은 공간의 자동연상으로 이어진다. 처음 들른 회사의 미팅 룸에서 풍긴 향긋한 냄새가 어땠나. 아마 첫 인상이 좋게 남아있을 개연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기업도 이제 향까지 신경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고급 승용차를 모는 이들은 대개 차 안의 향기까지 세심하게 선택한다. 좋은 방향제의 사용자들이다. 차별화의 방법으로 향이 이용되는 예다.

향과 파는 물건의 일대일 대응이 초기 수법이다. 이후 향으로 연상되는 관련 상품을 복합적으로 배치하는 기법으로 발전한다.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향을 풍겨 여행 상품이나 옷, 서핑 장비를 사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향기 마케팅은 인간의 감각을 연구하고 치밀한 분석기법으로 무장했다. 향이 추억과 욕망을 증폭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확신의 실천이다.

냄새는 힘이 세다 

사람들은 좋은 향을 좋아하고 나쁜 향은 싫어한다. 향의 호불호 판정은 명쾌하다. 중간의 선택이란 끼어들 틈이 없다. 향만큼 판정의 공통 빈도가 도드라지는 감각도 드물다. 향을 맡는 순간 75%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쾌감의 향은 대충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다음은 즐기는 방법에 따라 세분화되는 게 향의 세계다.

향수의 본산이라 할 프랑스에서 향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이다. ‘arôme’, ‘parfum’, ‘encens’, ‘bouquet’, ‘pragrance’ 등. 냄새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또 제작했던 조향(造香)의 역사가 만들어낸 세분화된 개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양한 향을 효과적으로 발산시키기 위한 물건들이 발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향수·화장품·세제·방향스프레이·디퓨져·인센스·방향봉투…. 우리는 이미 향에 둘러싸여 산다.

인간의 오감을 민감도로 순서화시키면 대략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순이 된다. 가장 둔감한 감각이라 할 후각은 한 번 박히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바뀐다. 냄새를 설명하긴 마땅치 않다. 대신 그리움으로 바꾸면 공감의 폭이 커진다. 엄마의 젖 냄새, 비 오는 날 초가의 흙벽에서 풍기던 냄새 등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후각의 잔재들이다.

인간의 회귀 본능을 “대치할 수 없는 냄새의 그리움 때문”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이는 바다로, 산에서 태어난 이는 산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떻든 향이 추억과 그리움으로 연결돼 있다는 대목에서 격한 공감을 하게 된다. 나 역시 태어났던 산 속의 나무 향기가 훨씬 익숙하게 다가오니까. 특정 향에서 추억과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 한다나.

뒤늦은 프루스트 현상을 겪었다. 몇 년 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를 드나든 이후 생긴 일이다. 몇 개의 호텔에서 공통적으로 풍겼던 향을 기억한다. 세월이 묻어 있는 벽돌과 흙의 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숲 속의 나무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장소와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에서 같은 향이 났다.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습도가 높은 날이면 젖은 낙엽 아니면 버섯에서 풍기는 향 같기도 했다. 분명한 건 마른 나무가 불에 탔을 때 나던 냄새의 잔재가 남는다는 거다. 인공의 화학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은 듯, 눈에 자극을 주지 않아 더 좋았다.

유럽에 있을 땐 몰랐다. 서울에 돌아오니 설명할 수 없는 향이 그리워졌다. 호텔 창 밖 숲에 비치던 교교한 달빛의 풍경까지 결합된 향의 기억은 은근하고 집요했다. 해가 바뀌어도 향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프루스트 효과를 실감했다.

한 장 뜯어 불붙이면 그윽한 향기

그리운 냄새를 서울에서 맡게 될 줄 몰랐다. 아는 이의 사무실을 우연히 방문한 것이 계기다. 반갑고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그의 회사가 휴대용 공기 정화제로 수입해 판매하고 있었다. 비로소 향의 정체를 알았다. 프랑스에서 만든 ‘파피에르 다르메니(PAPIER D’ARMENIE)’였다. 1885년부터 만들어 왔다니 올해로 132살 된 제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종이 방향제 혹은 인센스(연기로 향을 훈증시키는 향)라 불릴 만하다.

최고의 인삼이 우리나라에서 나듯, 질 좋은 벤조인 나무의 산지가 아르메니아다. ‘파피에르 다르메니’는 창업 때부터 변함없이 아르메니아산 벤조인 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주 원료로 쓴다. 여기에 소금과 천연 향료를 더한 안식향으로 발매 초기부터 인기가 높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향의 비결은 결국 최고의 원료에서 비롯된 셈이다.

조제된 향 액에 종이를 반 년 가까이 담궈 성분이 침투되면 노르스름한 색깔을 띤다. 눌러 건조시킨 종이를 명함첩 크기로 잘라 묶으면 완제품이다. 향을 적신 종이가 불에 탈 때 나는 연기로 공기 정화와 탈취를 한다. 훈증된 향이 번져 공간을 메우는 것이다. 유럽 여행에서 받은 기억의 강렬함은 고풍스런 호텔의 분위기와 겹쳐진 벤조인 향이었다.

만들어질 당시의 제법과 포장을 지금껏 지켜온 자부심이 놀랍다. 세월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오래된 물건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프랑스인과 함께한 탈취 방향제로 대체불가능한 신뢰가 쌓인 덕분이다.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파피에르 다르메니’를 모르는 프랑스인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수첩 사이에 끼워 넣고 다닐 만큼 작고 얇으며 값도 싸서 필수품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불쾌한 냄새를 없애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벤조인 향기의 효능은 믿을 만 하다. 좋은 물건의 힘은 국경을 넘어 확산된다. 유럽 사람들은 물론 여행자의 입소문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파피에르 다르메니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프랑스인의 필수품인 인센스 사용을 따라하는 거다. 낯선 호텔방에서 타인의 체취를 지우고 익숙한 향으로 채우고 싶을 때, 의식처럼 불을 붙여 연기를 낸다. 찝찝한 기분이 싸악 사라진다. 고양이를 키우는 동생의 집에서도 효과를 봤다.

내 작업실에 들어가 처음 하는 일도 파피에르 다르메니 한 장을 뜯어 주름지게 접는 일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바라본다. 어느새 주변이 향으로 채워진다. 마음까지 진정되는 리추얼이 괜찮다. 진짜는 요란스럽지 않고 나대지 않는다. 진광불휘(眞光不輝)가 바로 이런 거다.

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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