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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죄 인정하고 법에 복종” 판한넨 석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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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45>

상하이 부시장 시절, 시장 천이(陳毅·오른쪽 셋째) 등과 함께 중공 1차 대회장을 방문한 판한넨(오른쪽 첫째). 1952년 여름 상하이.

상하이 부시장 시절, 시장 천이(陳毅·오른쪽 셋째) 등과 함께 중공 1차 대회장을 방문한 판한넨(오른쪽 첫째). 1952년 여름 상하이.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판한넨(潘漢年·반한년)의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재판에 관심이 많았다. “모든 과정을 녹음해라. 홍콩에 사람을 파견해 녹음 장비를 구입해라. 관세는 임시예산에서 지출해라.”

징역 15년 정치적 권리 박탈 선고 #아내 둥후이도 먼저 풀려나 #생활비 받으며 이상한 가석방 생활

중앙 조직부에도 지시문을 보냈다. “방청 가능자 명단을 작성해라. 국장급 간부 중에서 200명을 엄선하되 일반 간부는 배제시켜라. 최고인민법원 간부도 예외가 아니다. 특별 출입증을 발부해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방청을 불허한다. 판한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국가 기밀 사항이다. 외부에서 몰래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창문도 조치해라. 녹음 자료는 파손 방지를 위해 매년 한 번씩 틀어 봐라. 기자들은 방청 대상이 아니다. 보도 자체를 금지시켜라.” 재판 날짜도 깜찍할 정도로 챙겼다. “베이징은 1월 9일부터 3일간이 가장 춥다. 평소보다 인적이 뜸하다. 기일 선정에 참고하기 바란다.”

1953년 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판한넨.

1953년 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판한넨.

1963년 1월 9일, 판한넨의 재판이 열렸다. 판한넨이 모습을 드러내자 재판정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배석판사 펑수화(彭樹華·팽수화)는 이날 본 판한넨의 인상을 잊지 못했다. “단정한 머리에 은회색 중산복, 온몸에서 지도자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8년간 영어(囹圄)의 고통을 겪은 사람 같지 않았다. 판사들은 판한넨의 정확한 발음과 단정한 몸가짐, 비상한 기억력에 경탄했다. 판에 박힌 검사와 재판장의 질문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고인 된 이유, 재판장이나 판사들은 알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 같았다. 최후 진술로 대체하겠다며 변호사의 변론도 막았다. 변명이나 부인을 한마디도 안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재판장을 비롯한 판사들은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판결문은 서면으로 송달하겠다”며 폐정을 선언해 버렸다. 재판을 마친 판사들은 머리를 맞댔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원래 작성했던 판결문을 살짝 수정했다. “피고인은 1936년부터 혁명을 뒤로 하고”라는 구절에서 “부터”를 지워 버렸다. 항일전쟁 기간 조국을 배반하고 일본특무기관과 어쩌구 저쩌구 했다는 구절도 판한넨에게 너무 불리했다. “조국을 배반했다”를 지워 버렸다. “상하이 해방 후, 잠복해 있던 국민당 특무들을 비호하고 엄호했다”는 부분도 손을 댔다. “비호”를 삭제했다.

저우언라이와 당 중앙 중요 지도자들이 판결문을 검토했다. 저우언라이는 한 자도 고치지 않았다. 문장 중간에 붉은 쉼표(,)만 찍었다. 판사들은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펑수화의 회고를 소개한다. “총리는 판한넨이 체포된 후, 공안부 회의실에서 자신과 판한넨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었는지를 실토하며 애통해 한 적이 있었다. 판한넨의 죄명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부호로 비준을 대신했다. 부호 하나 하나가 총리의 피눈물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지도자들도 동그라미로 화답했다.”

최고인민법원 형사부는 판한넨에게 징역 15년과 정치적 권리 박탈을 선고했다. 일부 재산 몰수도 덤으로 따라붙었지만, 재산이 없다 보니 형식에 불과했다.

판한넨과 둥후이 부부. [사진 김명호 제공]

판한넨과 둥후이 부부. [사진 김명호 제공]

선고 3주 후, 판한넨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유가 그럴듯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법에 복종했다. 회개에 꾸밈이 없고, 형기를 반 이상 복역했다. 가석방상태에서 공안기관의 관리를 받도록 한다.” 법원은 둥후이(董慧·동혜)도 한발 앞서 석방했다. 판한넨은 베이징 교외 단허(團河) 농장에서 조강지처와 합류했다.

이상한 가석방 생활이 시작됐다. 매달 생활비 200위안(元)이 나오고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꽃 키우고 낚시도 다녔다. 공안부 부부장이 직접 생활필수품을 들고 오다 보니, 농장 방문 온 고위층들도 판한넨의 거처를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판한넨은 베이징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베이징시의 공안부분 책임자들이 집으로 초청해 풍성한 요리를 대접하곤 했다. 집필도 불편함이 없었다.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공급받았다.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던 판한넨은 자신이 반혁명행위를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당과 정부의 조치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감격했다. 고향에 있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으로부터 관대한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현재 둥후이와 함께 농장에서 휴식 중이다. 건강은 이상이 없다. 8년 전보다 더 좋아졌다. 다시 일하게 되면, 국가와 인민의 관대함에 보답하겠다. 아직도 나는 반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

둥후이가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도 남아 있다. “나는 이미 이사했다. 현재 베이징 교외에 살고 있다. 도성(都城)에서 40리 떨어진 곳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공기도 좋은 곳이다. 한 출판사에서 교정 업무를 맡겼다. 문자와 씨름하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생활은 견딜 만하다.”

수십 년간 정보공작에 몸담았던 판한넨은 평소 사진찍기를 꺼렸다. 하루는 베이징 거리 산책 도중 작은 사진관을 발견했다. 잠시 주춤거리더니 둥후이의 손을 잡고 사진관 문을 밀었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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