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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9) 남편의 뒤늦은 홀로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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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종일 집에서 혼자 바둑을 두기에 뒷산에 가자고 했지. 근데 오가는 2시간 동안 혼자 앞서가며 ‘빨리 와, 어서 오라니까’ 오로지 이 말만 일곱 번을 하더라고.”

세상물정 모르는 은퇴 남편들 #아내 일 돕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노후 삶 염려 때문

은퇴한 남편이 답답해 보여 운동 삼아 함께 나갔다가 기분만 잔뜩 상했다는 여고 동창은 다시는 함께 가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친구들의 남편 성토가 줄을 잇는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종일 TV 리모컨만 끼고 산다든가, 그래서 한마디 하면 “내가 돈 버는 기계냐, 돈 안 벌어온다고 그새 대접이 달라졌다”며 샐쭉해진다는 거다. 직장을 그만둔 남편, 정치나 직장 얘기를 뺀 남편에게 얘깃거리는 별로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는 것.

집밥. [중앙포토]

집밥. [중앙포토]

또 먼저 식사하고 일찍 나간 아들의 밥상보다 반찬 수가 적을 경우 은근히 기분 나쁜 내색을 하기 때문에 얼른 먼저 밥상을 치운다고 해서 한바탕 웃게 된다. 직장을 은퇴한 남편이 그렇게 밴댕이 속인 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토라짐이 잦은 게 어린애나 여자 같다는 거다.

이런 자신들의 모습을 남자들은 과연 알기나 할까? 한마디로 ‘집에 두면 근심 덩어리, 데리고 나가면 짐 덩어리, 마주 앉으면 웬수 덩어리, 혼자 내보내면 사고 덩어리, 며느리에게 맡기면 구박 덩어리’라는 거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을 조롱하는 여자들의 우스갯소리. 정말 촌철살인이다. 이보다 더 은퇴 후의 한국 남성들을 잘 표현한 말은 달리 없을 것이다. 둘러보면 왕년에 한 자리 그럴싸하게 한 사람일수록 더 들어맞는다.

집안일은 차치하고라도 비서, 운전사에게 모든 일을 맡겼던 고위층 출신들은 더더욱 쓸모가 없다. 컴퓨터를 손볼 줄 아나, 전구를 갈아 낄 줄을 아나. 전화라도 해서 사람을 불러 해결하라 해도 전화번호도 제대로 못 찾는다는 것.

세상살이 더 서툰 왕년의 고위직 남편 

중년 배낭여행.[사진제공=웹투어(고영웅)·내일투어·레일유럽]

중년 배낭여행.[사진제공=웹투어(고영웅)·내일투어·레일유럽]

어디 동행을 하더라도 몽땅 챙겨줘야 하고, 오히려 집안일 다 마무리한 아내가 기다려야 할 판이니 울화통이 터진단다. 모처럼 여행을 가서도 대접만 받으려 해 아예 남편보다는 친구들끼리 가는 게 속이 편하다는 것이다.

동창들은 거기서 얘기의 새끼를 쳐 다음번 친구들끼리 함께 갈 여행지 물색에 나선다. 국내 여행지를 돌아 전 세계를 한 바퀴 수다로 돌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렇게 시작된다.

게다가 높은 자리, 전문직 출신일수록 남의 눈치 안 보고 살아 부부 모임 등 인간관계에서도 적응이 힘들어 ‘물가에 내보낸 애처럼’ 조마조마 하단다. “당신은 명령조로 말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라고 일러줘도 ‘소귀에 경 읽기’란다.

[중앙 포토]

[중앙 포토]

남편들이 나라 걱정을 도맡아 하듯 폼 잡고 이야기하던 정치, 경제 이슈도 이젠 비현실적이고 공허해 보여 딴 얘기를 하라고 눈치를 주면 기껏해야 분위기 깨는 소리만 한다는 거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들을 ‘못 부려 먹어서’도, 핀잔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비록 남편 흉을 늘어놓지만 그건 다 ‘한 배를 탄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우려인 것이다.

아내 일을 거들도록 하는 것은 남편 스스로의 노후 행복을 염려해서다. 아내가 아파 드러눕기라도 하면 그날부터 신세가 처량하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적당한 홀로서기가 그들 세상살이에 필요해 도와주는 거다.

때론 집안일을 시켜봤자 뒤처리가 더 많아져 아예 안 도와주는 게 돕는 거라는 걸 왜 모르리. 그래도 그들을 위해 눈 딱 감고 ‘시켜드리는’ 거란 걸 안다면 그저 남성들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hrko3217@hotmail.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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