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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멘토] ① 김응용,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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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빨강 셔츠를 입은 모습이 언제나 열정적인 김 회장 답다. 전민규 기자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빨강 셔츠를 입은 모습이 언제나 열정적인 김 회장 답다. 전민규 기자

“내가 한 일이 뭐 있어요? 그저 좋은 선수들을 만난 덕분이지. 내가 야구로부터 받은 게 많으니 이젠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1941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는 1940년생이다. 용의 해에 태어나 ‘용에게 응답한다’는 뜻으로 ‘응용(應龍)’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한국전쟁 때 부친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 왔다.

개성중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해 부산상고와 실업팀 한일은행 등에서 뛰었다.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을 지낸 뒤 해태 타이거즈 감독, 삼성 라이온즈 감독,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11월부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감독님, 아니 이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님이시죠.
나야 영원한 감독이지. 회장은 무슨 회장이야. 많은 분들이 아직도 나를 감독이라고 불러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허허.
어린 시절에는 야구가 아닌 축구를 하셨다면서요. 어쩌다 야구를 하게 되셨나요.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서는 축구 말고 할 게 없었어요. 겨울이면 논 위에 눈이 쌓이잖아요? 지푸라기 뭉쳐서 새끼줄로 감아가지고 공을 만들었어요. 놀이라고 해봐야 만날 축구밖에 없었어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오기 전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열 살이었지만 덩치가 크고 실력이 좋아서 학교 대표로 뽑혔죠.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어요. 어느 날 체육시간에 야구를 한 번 했지. 그걸 보고 야구부 주장이 ‘이놈아, 오늘부터 너 야구부야’라는 거예요. 그래서 야구를 시작했죠. 부산에서는 축구보다 야구를 더 알아주더라고. 물론 야구가 재미있기도 했고요.
1960년 청룡기 고교대회에 나선 부산상고. 키가 가장 큰 선수가 김응용이다. [사진 김응용]

1960년 청룡기 고교대회에 나선 부산상고. 키가 가장 큰 선수가 김응용이다. [사진 김응용]

피난 온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온 가족이 평원에서 평양으로 왔죠. 나야 어릴 때니까 평양에서 미군 탱크 보는 재미에 마냥 신났죠. 그 나이에, 그 시골에 구경할 게 뭐 있었겠어요. 평양에 와보니 곧 전쟁이 끝난다고 하는 거야. 대신 젊은 남자들은 사흘 만 숨어있으라고 합디다. (북한) 군에 징집될 수 있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며칠 피했어야 했어요.
나랑 큰 누이가 아버지 따라 나선다고 했지. 내가 함께 간다니까 아버지는 좀 귀찮아 하셨어요. 어머니와 형, 작은 누나, 여동생 셋은 평양에 두고왔죠.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거짓말 좀 보태면 길 위에 쌓여있는 시체를 밟고 피난을 왔어요. 그 장면은 아직도 생생해. 잊을 수가 없어요.
계속 남쪽으로 피난을 오다가 결국 부산에서 살게 됐죠. 나중에 해태 감독이 될 때 ‘이북에 있는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엄청 많이 왔어요. 편지도 보내오고, 사진도 오고…. 그런데 뭐 결국 다 거짓말이었지.

“학창 시절 내 별명이 뭔지 알아요? ‘갈비씨’였다고. 야구 하면서 몸이 커졌지. 나보다 10년 선배인 박현식 선배 같은 타자가 되고 싶었어요.”

학창 시절 야구 했던 얘기도 해주세요.
서면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때는 부대 경계에 철조망을 치지 않았어요. 미군들이 야구 할 때 (볼보이 해주는 척 하다가) 방망이나 글러브 훔쳐서 도망가는 거지. 미군들이 서너 발 쫓아오는 척 하다가 멈춰요.
초콜릿 주듯이 야구 장비를 원조한 거지. 우리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야구 했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입학하면서 체격이 좋아졌어요. 믿기 힘들겠지만 학창 시절 내 별명이 뭔지 알아요? ‘갈비씨’였다고. 야구 하면서 몸이 커졌지.
나보다 10년 선배인 박현식 선배 같은 타자가 되고 싶었어요.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고 불린) 박현식 선배가 프로야구에서 뛰었다면 아무도 근접하지 못할 기록들을 세웠을 겁니다. 덩치 큰 나보다도 체격이 좋았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21세에 국가대표가 됐거든. 박현식 선배가 31세 때였는데 같이 대표 생활을 했어요. 아마추어 선수였으면서 박현식 선배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했어요.
실업야구 시절 일본을 꺾은 건 한일전 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1963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였죠. 예선전에서 일본을 만나서 5 대 2로 승리했는데, 그게 광복 18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야구를 이긴 겁니다. 앞선 대회에서는 우리가 0 대 20으로 질 만큼 기량차가 컸어요.
난 그때 대표팀에 없었지만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대단합디다. 일본의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있잖소. 그런 선수들이 나왔다고. 그리고 1년에 40승(※실제로는 1959년 38승,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승 기록)올린 투수 스기우라 다다시도 있었죠. 스기우라가 잠수함 투수인데 우리 타자들이 헛스윙 하는 공을 포수가 일어서서 잡았답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심했다는 거지. 그런 일본을 예선전에서 처음 이겼고, 결승에서 또 만났어요. 내가 1회 희생플라이를 날려서 선취점을 뽑았습니다. 1 대 0이던 8회 박현식 선배님이 출루를 했고 내가 투런 홈런을 쳤어요. 그날 3 대 0으로 이겼는데 3타점을 나 혼자 낸 거죠. 투수로는 재일동포 신용균이 잘 던져줬고. 그때 아주 난리 났지.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격려 받은 김응용(맨 오른쪽). [사진 김응용]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격려 받은 김응용(맨 오른쪽). [사진 김응용]

“일본을 이기고 개선장군 같은 대우를 받았죠. 하지만 프로야구가 인기 있던 일본이 참 부러웠어요. 우리는 언제 프로야구를 하나 생각했죠.”

그 시절에 일본을 이겼으니 대단했겠습니다.  
서울에서 카퍼레이드 하고 개선장군들 같은 대우를 받았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라고. 그때는 청와대가 없던 시절이어서 장충공원 공관에 초청 받았죠. 그 분은 장군 출신이고, 난 그때 군 야구단 현역 졸병이었죠.
박정희 의장이 나랑 악수하면서 ‘김 선수랑 악수해도 선거법에 안 걸리겠지?’ 하시더라고. 그리고 내 소속을 묻더니 부대에 (회식 하라고) 황소 한 마리 보내준다더군. 근데 황소가 안 왔어. 안 보낸 건지, 누가 중간에서 꿀꺽 했는지. 허허.
그때가 가장 재미있고, 화려했던 시절이겠습니다.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일본이 참 부러웠어요. 일본은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였는데, 우리는 실업야구를 했으니까. ‘우리는 언제 프로야구를 하나’라는 생각만 했어요.
실업팀 크라운맥주 시절의 김응용. [사진 김응용]

실업팀 크라운맥주 시절의 김응용. [사진 김응용]

실업야구에서 은퇴한 나이가 31살이었죠.  
그때는 보통 27~28세가 되면 은퇴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나는 선수를 더 하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한일은행에서 뛰다가 선수 겸 감독을 하라는 거야. 팀에서 시키니까 한다고 했죠. 그런데 감독을 하다 보니 선수로 뛰기 어렵겠더라고. 나도 모르게 은퇴한 셈이지.  
1973년 한일은행 정식 감독이 되셨습니다. 77년에는 국가대표 감독도 하셨고요.
나쁜 얘기 좀 해도 돼요? 내가 한일은행에서 감독을 6~7년 했어요. 그런데 국가대표 코치를 한 번도 안 시켜주는 거야. 내가 뭘 잘못 한 건지…. 그런데 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제3회 대륙간컵야구대회 감독을 하라는 거야.
대회에 가보니 대한야구협회 임원들이 타순 짜는 것까지 간섭하더라고. ‘내일 경기하는데 왜 보고를 안 해’라는 거야. 초보 감독한테는 그렇게 하는 게 관례였나 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한일은행에서 감독할 때 나는 은행장 말 듣고 야구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할 거라면 여러분이 감독을 하시고, 코치도 하십시오. 난 보따리 싸서 갑니다’라고 했지. 허허. 그런 쇼를 했다고.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간섭 안 하더라고. 내 맘대로 했지. 그 다음 대회부터 그런 관례가 없어졌어요.
그 대회에서 한국이 준결승에서 일본, 결승에서 미국을 꺾고 세계무대 첫 우승을 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그때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았잖아요. 최동원 같은 에이스도 있었고, 김일권이나 이해창, 김재박처럼 빠르고 잘 치는 타자도 있었다고. 프로야구 초창기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활약한 덕분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감독님 자랑은 안 하시고 ‘선수들이 잘했다’고만 하시네요.
아니에요. 선수들을 잘 만난 겁니다. 난 운이 좋았던 거고.
야구 하면서 훈장을 3개나 받으셨습니다.
그렇죠.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석류장을 처음 받았어요. 감독이 돼서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후에는 백마장을 받았고요. 동백장은 포인트를 더해서 노무현 대통령 때 받았죠.
이렇게 3개나 받은 야구인이 나밖에 없어요? 운이 좋았죠. 지금은 한국야구위원회 박물관에 다 기증했지. 아들이 없고, 딸은 시집갔으니까 그걸 보관해줄 사람도 없잖아. 훈장 말고도 메달 등 기념품들이 50~60개쯤 있었는데 다 줬어요.
1981년 미국 조지아의 서던 칼리지로 야구 유학을 가셨죠?
무슨 유학이야, 유학은. 한일은행 감독을 10년쯤 했고, 대표팀 감독도 5년 정도 했으니 후배에게 물려줘야 할 것 같았어요. 미국 가면 애들 교육에 도움도 될 거 같았고요. 은행장님한테 가서 ‘미국 유학 좀 가겠습니다’고 했더니 행장님이 웃어.
‘김 감독이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거냐’며 웃더라고. 그래서 ‘미국 야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지. 은행장님 덕분에 미국에 갔어요. 그때 미국 프로야구부터 마이너리그, 학생 야구까지 열심히 다니면서 봤지. 그랬는데 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는 거예요.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의 김응용 해태 감독(오른쪽). [사진 김응용]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의 김응용 해태 감독(오른쪽). [사진 김응용]

미국에 계시는 동안 프로야구 지도자가 될 기회를 놓치셨군요.
허허. 그건 핑계지. 6개 구단의 감독·코치 인원을 더하면 마흔 명쯤 필요하지 않았겠어요? 내가 필요하면 전화했겠지. 행여 국제전화가 올까봐 매일 전화통 앞에서 기다렸지. 연락이 없어서 ‘내가 잘못 살았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83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 됐죠.  

“당시 해태 선수층이 얇긴 했지만 기량은 좋았어요. 무엇보다 전라도 근성이 있잖아. 몸쪽으로 오는 공을 안 피해.”

당시 해태 전력이 하위권이었죠.
선수들이 총 15명이었죠. 다른 팀들의 반도 안 됐어요. 82년에는 김성한이 타자도 하고 투수로 10승 했으니까 아주 웃겼지. 그래서 재일동포 김무종, 주동식 등을 데려오고 트레이드도 해서 35명으로 늘렸어요.
당시 해태 선수층이 얇긴 했지만 기량은 좋았어요. 무엇보다 (연고지인) 전라도 근성이 있잖아. 몸쪽으로 오는 공을 안 피해. 다른 팀 타자들은 도망 다니는데 해태 선수들은 몸 사리지 않고 맞고 출루했어요. 그거 없으면 안 되던 시절이었지.
83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97년까지 9번이나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정상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데요.
내가 한 것은 별로 없어요. 선수들이 다 알아서 했어요. 선동열, 이종범 등 좋은 선수들이 계속 들어왔죠. 그런데 말이에요. 우승을 많이 해도 해태 구단이 선수들 연봉을 많이 안 줬거든. 우승 보너스도 150만원인가 받았어요.
우승 반지도 선수들끼리 금은방 가서 맞췄다고. 사기가 오르지 않으니 해마다 (다음 시즌 개막 후) 4월 성적이 안 좋았어요. 그게 힘들었지. 그래도 선수들이 지는 걸 싫어해서 성적이 점점 좋아졌지. 해태 선수들이 잘 놀고, 술도 많이 먹었지만 할 때는 제대로 했어요. 그리고 우승을 해야 보너스라도 받지. 지면 뭐가 있나? 허허허.
1988년 빙그레를 꺾고 한국시리즈 3연패에 성공한 뒤 해태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김응용 감독. [사진 김응용]

1988년 빙그레를 꺾고 한국시리즈 3연패에 성공한 뒤 해태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김응용 감독. [사진 김응용]

감독님도 해태에서 18년을 계셨습니다. 감독으로 좋은 대우는 못 받으셨는데요.
나는 감독하면서 연봉 얼마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어요. 이 얘기 하면 후배 감독들이 섭섭해할지 모르겠는데, 감독이 구단과 연봉 투쟁(협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싫으면 다른 팀으로 가면 되니까.
지명 받으면 다른 팀에 갈 수 없는 선수들이 연봉 투쟁을 하는 거라고. 나는 주는 대로만 받았어요.
광주 홈경기나 서울 원정경기가 끝나면 해태 팬들이 “김대중”을 외친 다음 “김응용”을 외쳤습니다. 해태 팬들이 감독님을 참 좋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해태에 오래 있었으니까요. 내가 좋아서 있었던 겁니다. 팬들이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는데도 좋아해 주셨지. 처음에는 해태 팬들이 나를 거부했어요. ‘해태 감독으로 왜 부산놈을 데리고 오느냐’는 거야.
그래서 ‘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지만 고향은 이북이다’ 이렇게 대답했죠. 아주 웃겼다고. 광주 떠난 지 20년이 다 됐지만 지금도 가끔 광주에 가면 식당에서 밥값을 안 받으려고 난리야. 광주에서는 나 아직 안 죽었다고.
감독님이 덩치 크고 완력은 세지만 속은 굉장히 약한 분이라고 하시던데요.
덩치 큰 사람들이 원래 마음이 약하다고. 작은 사람들이 독종이지. 야구도 그렇잖아. 덩치 큰 사람들은 야구 하는 것도 물러. 나도 강한 척 했지만 속은 아니라고.

“타순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감독이 자신 없을 때 자꾸 타순을 바꾸는 거예요.”

2001년 해태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가셨습니다.  
그해 정규시즌 1위를 하고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와 만났잖아요. 두산이 준플레이오프부터 치렀으니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죠. 1차전 이기고 2차전 하려는데 비가 오는 거야. 하루 쉬니까 분위기가 바뀌더라고.
그때부터 선수들이 몇 차례 수비 실책을 했지. 내가 해태 감독으로 있을 때 삼성과 붙으면 삼성 선수들의 실책으로 이기곤 했는데…. 삼성 와보니 그게 징크스처럼 돼 있더라고요.  
이듬해인 2002년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님으로서는 10번째 우승에 성공했습니다.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셨죠.
스트레스는 항상 받습니다. 야구 감독 30년 하면서 여기(간)가 다 없어졌어. 간이 다 녹았다고. 허허.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말 이승엽이 동점 홈런을 치고, 마해영이 역전 홈런을 쳐서 LG 트윈스를 이겼죠.
그날 밤 축승회에서 현명관 구단주가 나한테 그럽디다. ‘이승엽이 시리즈 내내 부진한 데도 김 감독이 안 뺐잖소? 내가 그래서 속으로 김 감독 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명장은 다른가 봅니다.
이승엽이 결국 해낼지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거? 내가 알긴 뭘 알아요. 승엽이 말고 시킬 놈이 없잖아요. 그냥 내버려 두니까 친 거예요’라고. 껄껄.  
2002년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헹가래를 받고 있는 김응용 감독. [사진 김응용]

2002년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헹가래를 받고 있는 김응용 감독. [사진 김응용]

이승엽을 라인업에서 빼진 않더라도 3번타자가 아닌 하위타순으로 내릴 순 있었잖아요.
타순 바꿔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감독이 자신 없을 때 타순을 자꾸 바꾸는 거야. 난 해태 시절부터 (파격적인 기용을 가끔 했지만) 한 번 정하면 1년 내내 거의 바꾸지 않았어요.
2004년 현장을 떠났다가 2013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현장에 돌아오셨어요. 그해 8월 3일 프로야구 최초로 ‘감독 1500승’을 달성하신 뒤 “지금까지의 승리와 내일의 1승을 바꾸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허허. 한화에서 2년 동안 꼴찌 하면서 야구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해태에서도 못할 때는 있었지만 한화에서처럼 야구가 무서운 적이 없었어요. 투수가 약하니까 초반부터 무너지는 거야. 1승을 하기가 정말 어려워서 그런 말이 나왔어요.
2013년 11월 한화로 이적한 정근우와 이용규를 환영하고 있는 김응용 한화 감독. [사진 김응용]

2013년 11월 한화로 이적한 정근우와 이용규를 환영하고 있는 김응용 한화 감독. [사진 김응용]

감독 최다승(1554승)과 최다 우승(10회) 기록을 세우셨고, 야구단 사장(2005~2010년 삼성 라이온즈)도 하셨습니다. 지금은 협회장도 하십니다. 어떤 역할이 가장 좋았나요?
내가 가장 아쉬운 게 프로야구 선수를 못 해본 겁니다. 프로 선수를 해서 먹고 살 만큼 돈을 벌었다면 감독은 절대 안 했을 겁니다. 메이저리그 수퍼스타들, 코치나 감독 하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지금 선수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요즘에는 야구만 잘하면 수백 억 원을 벌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도 야구를 왜 저리 못할까 싶어. 돈은 그렇게 많이 받으면서.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벌어서 아마추어 야구를 위해 그 돈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이 돈 많이 벌어서 후배들 도와줘야 해요.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돈 걱정 않고 야구를 할 수 있게요.”

성공한 이들의 사회환원을 말씀하시는군요.  
야구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돈 때문에 야구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이야기 하면 또 코웃음 칠 텐데 우리는 한 팀이 공 5개 가지고 야구 했어요. 방망이 부러지면 못 박아서 테이프 감고 쳤다고.
물론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지만 학부모가 월 50만원, 100만원 내는 구조는 말도 안 된다고. 학생들도 해외 전지훈련 가잖아. 요즘 같으면 난 야구 못 했을 겁니다. 소득수준이 높은 일본도 야구 시키는데 우리만큼 돈이 안 들어요.
내 딸이 대학교수고, 사위가 연구원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 녀석한테 축구를 시키더라고. 이유를 물어보니 야구 시키는 비용이 비싸서 그렇대. 축구는 한 달에 7만원이면 된다고 하고. (※한국 중·고교 야구부 대부분은 학부모들이 내는 돈으로 운영비를 지출하고, 감독과 코치 월급을 준다.)
학교 체육이 바뀌어야 하겠군요. 야구인들이 해야 할 역할도 있을 텐데요.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 돈 많이 벌어서 후배들 도와줘야 해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은퇴 후 사회봉사 차원에서 리틀야구 감독을 하고 그러잖아요.
돈 걱정 하지 않고 야구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나올 수 있어요. 그게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에요. (※ 대한야구협회는 2016년까지 각종 비리에 연루된 사고단체였다. 지난해 아마추어 야구와 소프트볼이 합쳐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탄생했고, 초대 회장으로 김응용이 당선됐다. 김응용 회장은 협회로부터 월급과 판공비를 전혀 받지 않는다. 오히려 야구발전기금으로 사비 1억원을 출연했다.)
2015년 올스타전에서 이승엽 선수에게서 감사패를 받고 있는 김응용. [사진 김응용]

2015년 올스타전에서 이승엽 선수에게서 감사패를 받고 있는 김응용. [사진 김응용]

아마추어 야구에 금전적 지원 말고 또 뭐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선수들은 열심히 해야 하고 지도자들은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학교 체육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지. 우리는 교장실에 우승기 많이 갖다 놓으면 명문학교라고 해요. 아마추어 야구를 하는데 우승이 목표인 게 말이 돼요?
이런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미국 학교에 가 보세요. 그 학교 출신 메이저리그 선수들 사진을 걸어놔요. 학교가 몇 번 우승을 했느냐보다 그 학교에서 훗날 메이저리거가 몇 명 나오느냐가 중요합니다.
학생 야구는 결과(우승)보다 과정(육성)이 우선시 돼야죠. 그래야 학생들 무리 안 시킵니다. 생각이 싹 바뀌어야 해. 우리 야구도 이제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어려운 여건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하나 만나보면 모두 뛰어나고 성실한 젊은이들이잖아요? 그런데 사회가 어렵다 보니 모두가 힘든 것 같아요.
내가 하나 당부하고 싶은 건 끈기와 인내심을 가져달라는 겁니다. 아주 흔한 표현이지만 ‘한 우물만 파는 마음’으로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거예요. 재능보다 끈기가 중요할 때도 있더라고요.

글/ 김식 중앙일보 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영상/ 이문혁, 박승영 중앙일보 영상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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