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사 한 줄 알았던 60대 선원, CCTV 확인했더니…미얀마인 항해사 구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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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자정. 경기도 평택해양경찰서로 "사람이 배 갑판에 추락해서 크게 다쳤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평택당진항으로 출동한 해경은 배 위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A씨(61)를 발견했다. A씨는 곧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24일 평택당진항에 있던 화물선에서 60대 기관사 추락사 #해경, 실족사로 보고 수사하던 중 미심쩍은 정황 발견 #CCTV 확인 결과 부두와 배 연결하는 사다리 고정 안돼 추락 #이를 발견하고도 다른 선원들 응급처치 등도 안해 #해경, 미얀마인 3등 항해사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

이 배는 철강제품을 운전하는 파나마 선적의 1만t급 화물선이다. A씨는 이 배의 기관장으로 35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라고 한다. 배에는 선장과 선원 등 22명이 타고 있었는데 선장과 A씨만 한국인이고 모두 미얀마인이었다. 선원들은 "'쿵' 소리가 나서 배 위로 올라갔더니 A씨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해경은 당시 썰물로 부두와 배의 높이가 4.5m의 차이가 있었던 만큼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A씨가 실족을 해서 배 위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했다.

평택해경 청사. [사진 평택해양경찰서]

평택해경 청사. [사진 평택해양경찰서]

그런데 뭔가 수상했다. 먼저 현장에서 머리를 심하게 다친 A씨를 응급처치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해경은 인근 폐쇄회로 TV(CCTV)를 통해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그리고 CCTV 속 사건 현장과 현재의 현장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다.

부두와 배를 연결하는 사다리의 위치가 달랐다. 평택당진항은 썰물과 밀물로 인한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그래서 선원들은 부두와 배의 높낮이가 달라질 때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린다. 당시는 썰물로 배가 부두보다 4.5m 밑에 있었다.

경찰이 CCTV를 확인한 결과 A씨가 갑판에 쓰러져 있는 동안 미얀마인 선원들이 사다리를 옮긴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당시 사다리는 부두와 배에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CCTV를 좀 더 앞으로 돌리자 A씨가 사다리를 밟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도 확인됐다.  더욱이 이들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A씨의 맥박만 확인했을 뿐 구급차가 올 때까지 지혈 등 응급처치도 하지 않았다.

해경은 31일 육상과 선박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고정하지 않은 미얀마인 항해사 B씨(30)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항해사인 B씨는 육상과 배를 연결하는 사다리를 밀물과 썰물로 조류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위치를 변경하거나 조정해 고정하고 이를 계속 확인해야 한다. 또 환자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치료하는 위생사도 겸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제대로 하지 않아 A씨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해경 조사에서 "사다리는 누군가가 고정을 했을 것이라도 생각했다"며 "A씨의 맥박이 뛰고 있어서 죽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내가 응급처치를 했다가 잘못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있었다"고 진술했다.

해경 관계자는 "부두와 배를 연결하는 사다리가 고정되지 않아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던 A씨가 갑판으로 떨어진 것으로 확인됐다"며 "항해사 B씨가 출항을 앞두고 있는 화물선의 외국 선원으로서 도망갈 우려도 있고, 피해자가 사망한 만큼 긴급체포한 뒤 구속했다"고 말했다.

평택=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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