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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필카 … ‘구닥다리’ 감성에 빠진 2030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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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이태원의 한 편의점 앞에 설치된 ‘포토그레이’ 부스. 흑백 ‘아날로그’ 사진을 찍을 수 있다.[홍상지 기자]

서울 이태원의 한 편의점 앞에 설치된 ‘포토그레이’ 부스. 흑백 ‘아날로그’ 사진을 찍을 수 있다.[홍상지 기자]

두 명 정도 들어갈 만한 공간에 앉아 화면을 응시한다. ‘셋, 둘, 하나.’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의 표정이 화면에 담긴다. 그렇게 총 네 컷을 찍은 뒤 40여 초를 기다리면 사진이 나온다. 흑백이다. 28일 오후 서울 이태원 한 편의점 앞에 설치된 즉석 흑백사진기는 ‘아날로그’ 사진(종이에 인화된 사진이라는 의미)을 선사했다. 가격은 네 컷에 3000원, 카드 결제도 가능했다. 보정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사진은 ‘머그샷’(범인 식별용 얼굴 사진) 느낌을 풍긴다.

즉석 흑백사진 기계 앞에 긴 줄 #유료 필카앱도 세계 57만 명 이용 #사진 받아보는데 3일 걸려도 #“인간적이라 끌리고 재밌잖아요”

이 흑백사진기의 이름은 ‘포토그레이’다. 요즘 곳곳에 설치되고 있다. 주말에는 기계 앞에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친구·연인들이 줄을 선다. 수년 전 유럽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한 포토그레이를 두 달 전쯤 국내에 처음 들여온 정용승 포토마통 대표는 29일 “현재 전국에 기기 15개를 설치했는데 다음달에는 60개 이상으로 늘어난다. 들여올 때만 해도 이 정도 인기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라는 물음이 나올 법하다. ‘뽀샵(포토샵)’ 한 번 할 수 없고, 칙칙한 느낌의 흑백사진인데 인기다. 이 기계에 들어가 연속으로 세 번을 찍고 나온 김은경(24)씨 일행에게 이유를 물었다. “재밌잖아요.” 대답이 간단했다.

필름 카메라 느낌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닥 앱 첫 화면. [모바일 캡처]

필름 카메라 느낌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닥 앱 첫 화면. [모바일 캡처]

‘구닥다리’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트렌드’다. 특히 사진이 그렇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흑백사진·필름사진 등 아날로그 느낌이 나는 사진에 반응하고 ‘좋아요’를 누른다. 최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시장에서 유료앱 다운로드 1위는 지난달 7일에 출시된 ‘구닥 캠(Gudak Cam)’이다. 한때 카메라와 필름의 대명사였던 미국 업체 코닥(Kodak)과 단어 구닥다리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은 이 앱으로 필름 카메라(필카) 풍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한 번 앱을 작동시키면 24장까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24장이 다 채워지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새로 찍을 수 있다. 사진은 3일이 지나야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다. 불편하고 느리다.

구닥을 쓰고 있는 회사원 강요셉(26)씨는 오히려 그게 매력이라고 했다. “3일 정도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기도 하고 24장 찍으면 5~6장은 빛 번짐이 좀 심하게 나오는데 그것도 기다려 받은 것이라 그런지 소장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성격 급한 사람들은 스마트폰 날짜 설정을 변경해 사진을 바로 받아보기도 한다.

지난 27일 기준으로 전 세계 구닥 이용자 수는 57만3500명이다. 한국뿐 아니라 홍콩·대만·태국 등 해외 8개국에서도 유료앱 분야 1위다. 구닥을 만든 한국 업체 ‘스크류바’의 조경민 마케팅팀장은 “주어진 24장을 일상생활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들을 찾아 찍는데 ‘일상에서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는 이용자의 이야기가 가장 와닿았다. 이들에게 기다림은 불편함과 답답함이 아닌 설렘이다”고 말했다.

아예 필카를 애용하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정미진(30)씨는 날씨가 좋을 때, 여행 갈 때 늘 필카를 챙긴다.

정씨는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 카메라가 정말 내 눈에 비치는 현실을 찍는 느낌이라면 필카는 추억을 찍는 느낌이다. 결과를 스마트폰 사진첩 속의 사진을 삭제하듯 바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 ‘인간적’이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세대에게 디지털은 ‘차고 넘쳐나는 것’이 됐다. 이 때문에 아날로그는 신선한 것, 타인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니크’한 것이 된다. 기성세대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구닥다리’ 문화 열풍에 대해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흔치 않은 것에 열광하는 것, 어찌 보면 이 현상은 너무나 당연하다.”

홍상지·하준호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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