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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쪽이 달면 그 포도 맛은 틀림없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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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3면

[제철의 맛, 박찬일 주방장이 간다] 옥천 곽찬주 농민 포도밭

포도 철이다. 노지 제철이다. 제철이란 노지 재배, 즉 하우스 시설을 갖추지 않고 기르는 걸 말한다. 제철은 ‘맛있고, 싸고, 풍성하다’는 의미다. 같은 품종이라고 다 같은 맛은 아니다. 맛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경매장에서 kg당 1000원짜리가 있는가 하면, 1만5000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곽찬주 농민(70·충북 옥천군 포도연합회장·오른쪽)의 포도는 후자다.

캠벨 얼리와 거봉이 시장 석권 #청포도의 부활 알리는 청포랑 #켐벨·거봉 합친 맛 내는 충랑 #품종 다양화의 새로운 기대주 #다른 동물의 배설로 퍼지는 포도 #종의 보존 때문에 맛있게 익어 #색 진한 것 냉장고 숙성하면 좋아

하얀 포도 분이 손으로 문질러진 것처럼 된 것이 맛있다.

하얀 포도 분이 손으로 문질러진 것처럼 된 것이 맛있다.

“형편에 맞게 포도를 골라 드시면 됩니다. 다만 맛있는 포도는 비싸지요. 싸고 좋은 건 없어요. 세상 이치 아닌가요.”

그래도 방법은 있다. 같은 가격이라도 잘 익은 것을 골라야 한다. 국내 유일의 포도연구소(농업기술원 산하)를 이끌고 있는 박재성 소장이 힌트를 준다.

“보통 하얗게 분이 올라오는 걸 다 익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더 기다려야 해요. 분이 손으로 만진 것처럼 문질러진 모양이 되어야 최적의 맛을 냅니다.”(사진을 보시라.)

분은 포도의 당이다. 익으면 과육(과립) 밖으로 나온다. 농약으로 오인하기도 하는 그 하얀 분이다.

“분이 나오다가 다시 과일 안으로 응축됩니다. 그러면 밖에서는 하얀 분이 잘 안 보이게 되지요. 그때가 제일 맛있어요. 다시 말해서 분이 뽀얗게 덮여 있는 건 수확 전 상태니까 조금 더 기다려 합니다.”

보통 포도의 색깔로 맛을 짐작하는 건 틀리기 쉽다. 시장을 석권한 품종인 캠벨 얼리의 경우 다 익지 않아도 자흑색, 즉 진한 보라색으로 변해서 마치 잘 익은 것처럼 보인다. 분이 나오고, 다시 그 분이 과일 안으로 응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포도는 상당히 기르기 힘든 과일이다. 보통 일곱 번 손이 가야 한 송이가 익는다. 1년 내내 돌봐 줘야 한다. 더구나 포도는 한국에서 지배적인 ‘메인’ 과일이 아니다. 사과·배가 핵심이고, 포도는 ‘마이너’다. 저장성도 약하고 가격도 싼 편이어서 재배가 그리 선호되지 않는다.

요즘 우리 포도 시장은 딱 두 가지가 거의 석권하고 있다. 캠벨 얼리와 거봉. 캠벨 얼리는 거의 ‘토종’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오랫동안 재배했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1908년 보급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1980, 90년대의 스타는 거봉이다. 캠벨은 다른 종의 개발이 거의 없었지만, 거봉은 10여 종의 변종이 시장에서 팔린다. 물론 소비자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먹어 보면 같은 거봉이라도 맛이 다 달라요. 피오네, 자옥 이런 품종은 각기 맛이 다른 거지. 예를 들면 피오네가 자옥보다 맛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그걸 구별해서 살 수 없다는 게 문제지.”

게다가 거봉류는 씨가 없거나 있더라도 미숙한 상태, 즉 거의 ‘씨 없는 포도’ 수준이라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생산량도 늘어서 사 먹기 어렵지 않다. 시장에 나가서 살펴보니 도매시장에서는 커다란 송이가 3개씩 포장된 2㎏ 한 상자에 1만원 미만짜리도 꽤 많았다.

왼쪽부터 캠벨 얼리, 청포랑, 충랑, 자랑, 거봉 포도 중 자옥이라는 품종이다. 청포랑과 충랑, 자랑은 포도기술연구소에서 개발했다.

왼쪽부터 캠벨 얼리, 청포랑, 충랑, 자랑, 거봉 포도 중 자옥이라는 품종이다. 청포랑과 충랑, 자랑은 포도기술연구소에서 개발했다.

국내산 포도는 모두 150여 종이나 된다. 세계적으로는 350여 종이다. 허나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딱 세 종이 전부다. 캠벨 얼리, 거봉 그리고 머루포도로 알려져 있는 ‘새단’이 있다. 매일 먹는 벼도 우리는 품종을 모르고 사고판다. 과일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곽찬주 농민의 말이다.

“우선 다른 종을 농민이 잘 심으려고 안합니다. 보수적이에요. 포도나무를 심어서 과일을 수확하자면 3년은 걸리지. 그동안은 뭐 먹고 사느냐 이러는 겁니다.”

농민의 보수적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농촌 고령화가 더 큰 배경이라고 한다. 노인들이 농사를 지으니 적극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역시 곽씨의 말.

“캠벨 얼리가 병충해에도 강하고 비교적 일찍 수확할 수 있는 데다가 기르기도 쉬운 편이지. 노인더러 온갖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신품종을 기르라고 하기도 어려운 거예요.”

포도연구소에서는 좋은 품종의 포도를 개발, 보급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를 쓰고 있다. 시험장을 들어서니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품종의 포도가 각기 다른 조건에서 익어 가고 있다. 품종 개발은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통 20년은 거듭해야 한 품종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개발과 보급이 잘 안 된다. 현재 네 가지 품종이 개발 완료되어 보급 중이다. 자랑·청랑·청포랑·충랑이 그것이다. 청포랑은 국내에서 부진한 청포도의 부활을 알리는 품종이고 충랑의 경우 막강한 기대주다. 먹어 보니 거봉과 캠벨 얼리의 맛과 향을 합쳐 놓은 듯하다. 알도 굵고 맛도 아주 좋다. 두세 품종이 전부인 한국시장의 새로운 기대주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청포랑.

탐스럽게 익어가는 청포랑.

한국 포도는 온갖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품질이 전반적으로 올라갔다. 시설 재배가 아니더라도 비가림과 농장 바닥에 태양 반사체를 깔아서 일조량을 높이는 등의 노력이 더해져서 달고 맛있어졌다.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이육사의 시 구절이다. 경북 안동 출신이니 그 고장의 풍경일 것이다. 칠월은 당연히 음력이다. 요즘 팔월에 해당한다.

“청포도가 기르기 힘든 면이 있고, 덜 익은 포도로 보는 경향도 한몫했어요. 자연스레 재배가 줄었지. 또 캠벨 등에 비해 청포도는 대개 향이 없었어요. 과일은 향도 좋아야 잘 팔리거든.”

요즘 향 좋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머스캣 등 청포도가 다시 재배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와인 제조에 적합한 청포도가 늘고 있어 어쩌면 국산 와인의 성가를 드높일 가능성도 크다.

옥천 지방을 둘러보면 곳곳에 포도 상징물이 있다. 군의 상징 작물이다. 옥천은 군 전체를 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분지다. 그래서 온도가 높다. 포도는 낮에는 고온, 밤에는 서늘한 기후에 잘 익는다. 무조건 덥기만 하다고 포도 맛이 좋아지지 않는다. 서늘할 때 포도가 단맛을 응축하기 때문이다.

“생산량으로는 영천이 1등이고, 김천, 영동 등지가 국내 주산지에요. 요즘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어요. 시설 재배법이 보급되고, 강원도 같은 곳도 노지 재배를 할 수 있게 기후가 변했으니까. 예전에는 강원도라면 겨울에 나무가 얼어 죽어서 재배를 하기 힘들었지.”

새들이 포도알을 따먹고 남은 가지가 덩그러니 달려 있다. 새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따먹는 습성이 있다. 김경빈 기자

새들이 포도알을 따먹고 남은 가지가 덩그러니 달려 있다. 새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따먹는 습성이 있다. 김경빈 기자

한국 기후가 점차 포도 생육에 유리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많은 기후 전문가들은 유럽의 와인용 포도의 북방한계선이 북상하면서 장차 새로운 지도가 그려질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의미다.

“요새 온도도 높아지고 생산기술도 늘어서 포도 당도가 많이 올라갔어요. 옛날보다 맛있어졌지. 값도 맛에 비해 아주 싸요. 30년 전에도 좋은 포도는 1㎏에 만원이 넘었어요. 지금도 그 가격이에요. 농민이 너무도 힘듭니다만, 그래도 소비자에게는 좋은 기회지요. 맛있는 포도를 많이들 드시길 바랍니다.”

포도 명인이자 평생을 포도 농사와 보급에 힘써 온 곽찬주 농민의 바람이다.

포도송이의 맛을 보는 비결이 있다. 매달려 있는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위쪽에 달린 포도가 더 달다. 그러니, 밑의 뾰족한 쪽에 달린 포도알을 먹어 보아 달다면, 그 포도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은 포도송이 자체에서 알을 솎아 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품질이 좋아지기도 했다. 보통 100개 정도의 알이 있다면, 30개는 솎아 낸다.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고단하고 힘든 일이다.

여우의 신포도는 유명한 이솝우화다. 포도가 영양을 빨아들여 포도알을 맛있게 만드는 이유는 종의 보존 때문이다. 포도가 달고 맛있어야 짐승이 따 먹고, 다른 곳에 배설한다. 이때 씨가 퍼뜨려지고, 종이 잘 번식하게 된다. 놀라운 우주의 섭리다. 포도는 익으면 달게 변한다. 여우가 먹은 건 철이 이른 포도였을 것이다. 곽찬주 농민은 포도 전도사다. 좋은 포도에는 어떤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포도가 몸에 좋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품종마다 맛이나 당도, 향의 한계가 정해져 있어요. 그걸 넘어 버릴 정도로 잘 기른 건 그때부터는 약이 되는 거예요. 폴리페놀이 엄청 강해지거든.”

맛있는 과일을 넘어 그 농도가 짙어지면 약성이 발휘된다는 뜻이다.

“포도는 색이 진한 걸 사는 게 맞아요. 블루베리, 가지처럼 자흑색(紫黑色)인 작물이 약성이 세다고 하잖아요. 포도 많이 드세요.”

포도란 놈은 생명력이 아주 강하다. 원래 줄기 하나를 꽂아 두면 넝쿨이 된다는 종이다. 집에 포도 한 상자를 사서 놔두면 파랗던 줄기가 까맣게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포도송이가 줄기에 남아 있는 영양을 다 빨아먹어버리기 때문이란다.

“사온 포도는 종이포장에 싼 채로 냉장고 채소칸에서 사나흘 숙성시키면 더 맛있습니다.”

옥천군도를 달리는데, 후끈한 열기가 대지에 가득하다. 포도가 마지막으로 익어가는 철이다.

박찬일 글 쓰는 요리사라는 별칭이 있는 인물.
음식 칼럼을 오랫동안 써 왔다. 딱딱한 음식 글에 숨을 불어넣는 게 장기다. 청담동에서 요리사 커리어를 쌓았고, 지금은 서교동과 광화문에서 일한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로 서양 요리를 만드는 일을 국내 최초로 시도한 일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이 지면에서 상식을 비틀고 관습을 뒤집는 제철 재료와 음식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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