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한표욱 前 유엔대사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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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숨가빴던 시절 한국 외교사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영원한 외교관'을 잃었습니다."

25일 오전 3시30분 한표욱(韓豹頊) 전 유엔대사가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윤하정 (尹河珽) 전 외무부 차관은 고인의 한평생을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또 "고인은 교섭 능력.외국어 능력.온유한 성품 등 외교관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조건을 갖췄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1916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 재학 때 국사(일본사) 시험시간에 일본사는 우리 국사가 아니라며 답안을 백지로 내 당시 영문학과장 백낙준 박사 등을 놀라게 했다.

고인이 고(故) 이승만 박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39년. 그는 배편으로 미국에 가는 길에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李박사를 처음 만난 뒤 42년 말부터 미국 전역을 돌며 독립운동을 펼칠 때 동행했다.

"고인과 李박사는 워싱턴에 살 때 인근의 포토맥강으로 자주 낚시를 하러 갔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직접 김치를 만들어 고인에게 주었어요."(李박사의 아들 이인수씨)

그는 48년 주미대사관 창설요원으로 발탁되면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장면.양유찬 주미대사 밑에서 1등서기관.참사관.공사로 일하면서 초창기 한.미 외교의 틀을 짰고, 80년 주영국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무대에서 은퇴했다.

그는 84년 '한미외교 요람기'를 발간하면서 소회를 밝혔다. "해방 후 현재까지 우리 외교의 기본 축은 한.미 외교였다. 내가 참여한 초창기의 대미 외교는 어쩌면 후세의 사가들이 '구걸외교'라고 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때를 남의 힘으로 독립한 약소국가가 다시 먹히지 않고 자립하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의 한 단계가 아니었던가라고 생각한다."

고인은 84년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의 초대 교수로 초빙돼 2001년 2월까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유족으로는 아들 종승(재미)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 병원이며, 영결예배는 29일 오전 9시30분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다. 02-392-3499.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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