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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시 '포지션', 박민정 단편 '바비의 분위기' 본심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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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후보작>

 이민하 - '포지션' 등 14편

 포지션

 발육이 더딘 마을에서 너무 자란 사람은 눈에 띈다
 너는 외로움이 2미터까지 자랐다
 누구를 마주 보든 그림자가 넘쳤다
 누구든 빠져들 만한 깊이였다

 누구든 돌아볼 만한 부피였다
 누구에게든 들키고야 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행동이 느려지고 외로움은 더 뚱뚱해졌다

 너는 운동을 시작했고 운이 좋으면 유니폼을 입을 수도 있다
 외로움의 백넘버가 등골에 박히고
 어디서나 촉망받는 프로가 되었다 현란한 개인기로
 카메라 속에서 뛰거나 바다를 건너갈 수도 있고

 검열관이 난입하는 마을에서도 선수답게
 타인의 외로움과 몰래 뒹굴 수 있다
 잘하면 밤새 끌어안고 어둠의 끝까지 튈 수도 있다

 (…)

 너는 공(空) 하나를 갖고서 시간의 알을 득점한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외로움이 쿵 쓰러질 때까지
 잘하면 한평생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있다

시

 ◆이민하
 1967년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모조 숲』『세상의 모든 비밀』. 현대시작품상 수상.

 #내가 읽은 이민하 - 김수이 예심위원
너의 외로움은 키가 2미터. 쉽게 사람들 눈에 띈다. 부피도 크고 뚱뚱해서 누구에게든 들키고야 만다. 너의 비범한(?) 외로움은 도처에서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발탁된다. 너는 가히 외로움의 프로 선수. 외로움의 백넘버를 달고, 텅 빈 코트에서 홀로 ‘삶’이라는 경기를 치른다. 가끔은 타인의 외로움과 함께, 은밀하고도 처절히.
 외로움이 쓰러질 때까지 한평생 공중에 떠서 현실에 발붙이지 못할 수도 있는 너는, “검열관이 난입하는 마을”의 거주자. ‘외로운 인간’을 단속하고 교정하려는 현대사회는 인간의 중심에 있는 외로움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한다. 이 외로움이 존재의 밖을 향해 계속 점프하며 자라난다는 사실도.
 이민하의 시는 ‘외로움의 생체학’과 ‘외로움의 사회학’을 오가며 현대의 인간이 처한 곤경을 그린다. 팽창하는 외로움의 너머로 발돋움하며 그녀가 보는 것은, ‘너’의 외로움과 ‘너’의 수난이다. 지금 이민하는 초기시에서 구사했던 절단된 신체의 드라마틱한 환상들을, 참사와 폭력에 희생된 약자의 실제 현실로 다시 쓰고 있다. ‘너’에게 패스하고 슛을 날리는 이민하의 ‘공(空)’은 삶의 모든 체험들의 텅 빈 중심인 외로움으로 빚어졌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부정하는 것을 끌어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 이민하의 시 쓰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김수이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 『서정은 진화한다』『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박민정 - '바비의 분위기'(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유미는 그 방을 보물섬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그렇게 규정지었고, 기억했다. 보물섬이 폭발한 날 이후 오빠와 유미는 그 날에 대해 언급한 적 없었다. 아마 ‘보물섬’이라는 말을 꺼내본 적도 없었으리라고 유미는 생각했다. 아무 때나 서랍을 뒤지면 피자배달 쿠폰이 우습게 쏟아져 나왔고, 오빠 나 이걸로 시켜먹는다, 하고 키득거리면 그러라고 하는 오빠가 있던 방. 지난번에 읽은 만화 시리즈의 이어지는 편을 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좁은 골목을 달음박질로 통과했고 돌계단을 뛰어올라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따고 들어가던 기억이 살아가는 내내 생생했다. 보물섬이 폭발한 후 그 집에 관한 기억은 끝났다. 그 집이 불타버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가하면 그 시절에 관해 유미에게는 다른 종류의 기억도 있었다.
 유미와 함께 시장에서 햄스터를 사들고 오던 오빠에게 거실에서 기다리던 큰아빠가 던진 말. 사내자식이 학교에서 처 맞고 다니는 거냐? 그것도 계집애들한테. 유미는 얼른 보물섬으로 피신했고 더 이상 듣지 않았다. 풀죽어 방에 들어온 오빠에게도 묻지 않았다. 어른들은 유미가 듣는데서 말조심 하지 않기가 매한가지였는데 오빠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고 맞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그랬다. 오빠는 괴로운 교실을 버티고 있었고 그럴수록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유미는 그런 오빠가 불쌍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오빠가 외로울수록 자신에게는 흥미로운 것들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빠의 분신과 같았던 그것만 건드리지 않으면 유미는 뭐든 갖고 놀 수 있었다. 그 방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을 만져보고 꺼내볼 수 있도록 해줬지만 오직 하나 허락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빠가 애지중지 아꼈던 486컴퓨터였다.

 새로운 매체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 특수한 매체환경에서 생존하는 방식,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문해력이다.
 유미는 물끄러미 모니터를 바라봤다. 논문초록에 넣은 문장이었다. 초록까지 교수들이 관여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들이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을 문장을 적어낼 수 있었다. 논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결국 이렇게 요약해야 했다. 유미에게 다른 말은 중요하지 않았고 이 말만이 중요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목차를 구성했고 소목차의 세부 내용을 만들었으며 수많은 참고문헌에서 이론적 토대를 빌렸다. 무엇보다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 유미로서는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던 지난한 논쟁을 따라갔다.

 ◆박민정
 1985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창과, 동대학원 문화연구학과.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아내들의 학교』.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

 #내가 읽은 박민정 - 노태훈 예심위원
 이제 한국소설에서 페미니즘의 수준은 여기까지 올라왔다. 명백하고 분명한 폭력이 아니라 미묘하고 혹은 기묘하기까지 한 혐오의 양상을 박민정은 예리하게 짚는다. ‘사촌오빠’의 “보물섬”은 ‘오타쿠’, ‘너드’ 같은 새로운 언어로 ‘이해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범죄’와 ‘폭력’을 낳았는데, 그렇다면 오빠는 나쁜 사람인가, 혹은 지금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주위를 배회하는 남자는 나쁜 사람인가, 하고 주인공 유미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왜 그들을 이해해야 할까, 아니 왜 이해해줘야 하는 걸까, 새로운 매체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여전히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물음들 역시 유미를 괴롭히고 있고,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롭게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집착을 넘어 결국 폭력까지 행사하는 대상은 그럴 만한 상대, 즉 자신이 원하는 외형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면서 접근 가능한 여성이다. 즉 ‘바비’가 아니라 ‘바비의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 정작 ‘바비’를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이 남성들이 권력의 우위에 서기 위해 촉수를 얼마나 세우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새삼 섬뜩하기까지 하다.

 ◆노태훈
 문학평론가. 1984년 경남 산청 출생. 서울대 국문과.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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