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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김인경 ‘길고 굽은 길을 걸어’ 높이 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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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인경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성격이 똑 부러지는 소녀였다. 중학생 때 만난 김인경은 그랬다. 골프를 하는 다른 아이들 보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다. 골프에 대한 의지도 컸다.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같은 세계 1등이 되길 원했다. “1등에 깃발 꽂고 내려오지 않을래요”라고 말할 정도로 당찼다. 어릴 때부터 유명 선수들의 장점을 꼼꼼히 기록한 골프 다이어리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김인경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타이거 우즈(미국)의 것이었다. ‘항상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우승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불운한 사람들에 연민 #우즈에 밀린 2인자 엘스 좋아하고 #평생 고통속에서 산 반 고흐 흠모 #봉사·기부의 여왕 #다치면서까지 장애아동들 돌보고 #2010년 대회 우승 상금 전액 기부 #담담해진 30㎝ 퍼트 악몽 #이제 아무리 짧아도 넣으면 행복 #꿈꾸던대로 비틀스의 나라서 정상

어니 엘스

어니 엘스

노트에는 우즈보다 어니 엘스(남아공)에 대한 내용이 더 많았다. 김인경은 “스윙도 자연스럽고, 우즈에 밀려 2인자에 만족해야 하는 그에 대해 연민이 든다”고 했다. 우즈와 전성기가 겹쳐 가장 불운했던 선수가 엘스였다. 우즈가 우승한 경기에서 가장 많이 2위를 한 선수 엘스에게 김인경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특이했다.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져야 하는 전쟁 같은 선수생활을 잘 해낼지 걱정도 됐다.

김인경은 씩씩했다. 2005년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아마추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LPGA Q스쿨도 1등으로 통과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비틀스에 심취했는데 그룹의 아이콘인 존 레논이 아니라 폴 매카트니를 더 좋아했다.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블랙 버드’를 부르곤 했다. 깜깜한 밤, 날개가 부러진 검은 새가 다시 날기 위해 애를 쓴다는 내용의 슬픈 노래다. 그림을 그리면서 빈센트 반 고흐를 사랑했다. 살면서 딱 한 점의 그림만 팔 수 있었던,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산 반 고흐를 김인경은 흠모했다.

김인경은 왜 구슬픈 노래와 불운한 선수를 동경했을까. 김인경이 다치기까지 하면서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덥석덥석 자선기금을 내는 것을 보고 추측할 수 있었다. 김인경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반 고흐의 그림 ‘슬픔’처럼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려 했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많았던 것 같다.

골프는 딱 한 명이 이기고 100여명이 지는 게임이다. 연민을 가진다면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잘 버텼다. LPGA 신인이던 2007년 그는 열아홉살이었다. 당시 웨그먼스 LPGA 대회에서 두 홀을 남기고 3타를 앞서다 당시 세계랭킹 1위인 로레나 오초아(멕시코)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김인경은 그날 경기를 마친 뒤 “지금 울 수도 있지만 울지 않겠다. 나는 랭킹 1위 선수와 잘 싸웠고 경험을 얻었다. 앞으로 나의 많은 우승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인경은 3년 후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한 뒤 상금을 오초아 재단에 기부했다.

2012년 나비스코 챔피언십 30㎝ 퍼트 사건은 모두 다 안다. 어떤 메이저 대회는 우승자가 아니라 우승을 놓친 선수가 기억된다. 당혹스러워하던 김인경의 모습은 골퍼들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골프는 극단적인 멘털 스포츠다. 김인경은타인의 슬픔에도 아파하는 선수다. 본인이 당한 그 슬픔엔 얼마나 더 아팠을까.

김인경은 7일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인근 킹스반스 골프장에서 끝난 LPGA 투어 리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합계 18언더파로 우승을 차지했다. 놀랍게도 우승 후 김인경은 울지 않았다. 2012년 일에 대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얘기했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그 얘기를 묻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짧은 퍼트를 놓치는 건 인생 최악의 사건은 아니다. 대신 그 일 때문에 1m짜리 퍼트도 당연한 게 아니라고, 오히려 넣으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게 오늘 내가 (1등으로) 끝낸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건드려서 그 30㎝ 상처에 딱딱한 굳은살이 박인 것도 같다. 그래도 슬픔이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인경은 이전부터 “메이저대회에서, 이왕이면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하면 좋겠다”고 했다. 기대대로 결국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김인경은 비틀스의 노래 ‘long and winding road’ 가사처럼 길고 굽은 길을 걸었다. 김인경은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비틀스의 나라, 우울한 비가 오는 골프의 성지에서 평안을 찾았다.

스코틀랜드 킹스반스에서=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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