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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전략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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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원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나쁜 것은 경영자인 저입니다.”

경영 파탄한 일본 야마이치(山一)증권의 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 흐느끼며 종업원들의 재취업 지원을 호소했다. 아직까지 일본인들의 기억에 선명한 장면이다. 당시 함께 뉴스를 보고 있던 한국인 친구가 했던 혼잣말도 잊지 못한다. "사장이 울어 주는 것만으로도 부럽다. 우리나라에는 이게 없다." 1997년 초겨울, 한국도 한참 위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구조개혁에 매진해 온 동아시아 각국은 물론 미국조차 엔론 파탄 뒤에는 기업 지배구조 개혁, 분식회계를 둘러싼 법령 준수(compliance) 강화 등을 강하게 요구받게 됐다. 최근에는 여기에다 환경.안전문제와 다양한 고용 실현까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CRS) 범주에 들어가고 있다. CRS가 세계적인 추세가 된 것이다. 환경을 배려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하는 펀드 같은 것이 늘어나 2004년에는 세계표준화기구(ISO)가 책임의 규격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글로벌기업들에 이익과 사회와의 조화가 더욱 요망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이른바 일본적 경영에서는 CRS란 먼저 고용 유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나 강한 노조 등에 의해 강요됐던 것은 아니었다. 기업 스스로 장기고용을 경쟁력 확보의 원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비로소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야마이치증권의 사장도 통곡했던 것이다. 기업이 그 필요성을 실감하지 않는 한 CRS는 단순히 이미지 전략 내지는 복지사업 수준에 그치고 만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한편 너무 무리하다 보니 기업들의 불상사가 계속 발생했고, 컴플라이언스나 위기관리 등이 CRS의 중심이 돼 버렸다. 벤처기업의 기수였던 라이브도어의 연금술 파탄도 다시 한번 컴플라이언스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보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에는 성장의 지속성과 연관된 CRS가 비즈니스 차원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에선 자동차산업의 하이브리드차 투입이나 연료전지차 개발은 물론 식품산업에서의 유기식품 증가, 식품가공 이력 관리, 생태계 보존, 쓰레기 폐기 시스템 개선 등의 CRS를 성장 지속을 향한 비즈니스 전략 및 기회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일부에서 노동력 부족이 나타나면서 정보기술(IT)화가 작업 효율화나 장애자 활용, 환경 솔루션 등의 면에서 새로운 공헌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 지배구조가 구조개혁의 핵심이 되면서 CRS도 거의 여기에 집중돼 왔다. 재벌계 기업에는 그 발전과정 및 거대함에 더해 정치성까지 가미되다 보니 내부거래나 상속을 둘러싼 법령 준수, 나아가 소액주주 보호 등이 커다란 정치.사회문제가 돼 왔다.

실제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배운 것처럼 투명성과 공정성은 존속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다. 하지만 한편으론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매일 수익을 올려야 하는 지상과제를 떠안고 있다. 유교적 도덕론이나 정치사회운동에 의한 격렬한 대립은 기업의 CRS를 보다 위기관리 쪽으로 집중시키고 만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폭넓은 CRS 쪽으로 달려들게 할 인센티브를 주지 못한다.

한국 현실에서는 기술 개발, 중소기업과의 거래 확대, 다양한 인재에 대한 훈련과 기회 제공, 환경보호 등에 폭넓은 CRS가 요청되고 있을 것이다. 기업도 또 그것을 비즈니스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사회의 공기(公器)가 돼 '패밀리기업'에서 탈피할 수 있다. 전통 있는 기업은 모두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이념을 사회와 공유한다. 삼성그룹 창업자가 내걸었던 사업보국(事業報國). 그 창업 이념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경영 속에 있어도 형태를 바꿔 계속 빛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의 그 의의가 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카가와 유키코 도쿄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