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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시각각

“진보 집권=평화”가 착각인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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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진보가 집권하면 평화 오고, 보수가 집권하면 전쟁 온다.”

북한의 핵야욕 안중에 남한은 없어 #어설픈 환상 버리고 압박 집중해야

문재인 정부 사람들과 민주당이 야당 시절 자주 써먹었던 주장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90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북한은 7번이나 미사일을 쏘아댔다.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 동안 2번, 박근혜 정부 3번에 비해 훨씬 많은 숫자다. 미사일의 차원도 달라져 이제는 미 본토를 직접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으로 발전했다.

이제 북한 핵은 1993년 불거진 이래 사반세기 만에 미국의 목덜미를 정조준하는 안보이슈가 됐다. 그동안 미국은 북핵을 핵비확산체제(NPT) 에 대한 도전으로만 간주했다. 그래서 안보리를 통한 간접 해결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젠 북한과 직접 딜을 하든지, 아니면 군사 행동을 해서라도 뿌리를 뽑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북한으로선 수십 년 묵은 안보 불안을 해소할 천재일우의 상황을 맞았다. 갖은 고통을 무릅쓰고 핵 개발을 밑어붙인 끝에 워싱턴과 얼굴을 맞대고 ‘핵국가’ 지위를 인정받을 기회에 근접한 것이다.

당연히 미국과 북한은 이런 빅딜에 한국이 끼는 걸 꺼릴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운전석’론을 내세우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데 기가 찰 것이다. 핵 국가들(북·미)끼리 ‘군축’을 논의하는 자리에 핵은커녕 전시작전권조차 없는 한국이 끼어들겠다는 것 자체가 가소로울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워싱턴과 평양의 대화에 서울이 끼는 게 불편하다. 더욱이 동맹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듯한 진보 정부가 북·미 대화에 끼면 2(남북)대 1(미국)의 구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할 것이다. 지난주 국회를 찾은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가 “(북핵 문제에서) 한국은 ‘주된 역할’이 아니라 ‘역할 가운데 하나’를 하는 것”이라 말한 건 그런 미국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 워싱턴은 평양에 ‘강압 외교’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전쟁 불사’를 외치며 고도의 압박을 가해 북한이 대화에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강대국이 작심하고 벌이는 이런 권력 정치엔 약소국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따라서 한국이 택할 길은 분명하다. 앉을 수 없는 운전석에 앉겠다고 대화 고집을 부릴 게 아니라 미국의 강압 외교에 동조해 북한을 몰아붙여야 한다.

미국의 푸들이 되자는 게 아니다. 북한을 강하게 조여 “협상 외엔 살 길이 없다”는 걸 깨닫게 만들어야 대화가 재개될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대화의 주도권’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임기 5년의 대통령들이 재임 중 남북관계에 성과를 내겠다고 설치다 상황만 악화시키기 일쑤였다. 북핵이 미국의 관심권 밖이었던 과거엔 그렇게 해도 나라의 안위가 흔들리진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처신하지 않으면 ‘코리아 패싱’ 아니라 ‘코리아 페일(파국)’을 당할 수 있는 초유의 위기상황이다. 하지만 청와대에 포진한 86 그룹 보좌진의 인식은 너무나 안이해 보인다. “우리가 북한에 손을 뻗치면 결국 따라올 것”이란 근거 없는 집단사고(group think)에 갇힌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래서는 북핵도 막지 못하고 동맹 관리도 실패한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긴 말 않겠다. 사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했듯이 즉각 ‘임시 배치’에 들어가야 한다. 또 단둥은행을 비롯해 북한과의 불법거래 혐의로 미국의 제재를 당한 중국 기관들에 우리 정부도 제재를 가해야 한다. 평양과 베이징의 심기까지 헤아리며 양다리를 걸치기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태롭고 여유가 없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