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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우리를 끝내 인간이게 하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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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얼마 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우연히 어떤 한국인 가족의 기념사진을 찍게 되었다. “웃으세요, 치즈!” 나는 환하게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중국인 단체관광객 행렬이 나와 그 가족 사이를 보란 듯이 지나쳐 가고 말았다. 모처럼 가족사진을 찍으려던 한국인들은 ‘중국인은 역시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중 관계가 아무리 악화됐어도, 설사 우리 쪽이 피해를 보았다 하더라도 ‘중국인이기 때문에’ 더 분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진을 열심히 찍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대놓고 우리를 무시하는 중국인 관광객의 무심한 표정은 충격적이었다.

무례한 군중 틈에서 빛 발한 중국인 관광객의 작은 배려 #인간 존엄·포용에 대한 희망, 영화 ‘덩케르크’에서 느껴

그런데 단체관광객 대열 맨 마지막에 서 있던 한 여성이 “정말 미안합니다(I’m so sorry!)”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It’s Okay, don’t worry!)”라고 전광석화처럼 대답해 버렸다. 순간 그녀와 나 사이에 뭔가 따스한 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들이 중국인이라서’ 그 무례를 더 심하게 비난하는 집단적 심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었고, 그녀는 ‘그저 그런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무례함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꼿꼿한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 순간적 소통의 반짝임에 마음을 빼앗긴다. 집단적 감정이나 조직의 논리에 따라 관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소신과 원칙, 감성과 인격의 목소리를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때 눈과 귀가 번쩍 뜨인다. 오랫동안 착실히 쌓아 온 믿음과 원칙은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을 발한다.

최근에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를 보면서 극한상황에서도 우리를 끝내 인간이게 만드는 힘을 생각해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덩케르크에 고립된 40만의 연합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처절한 사투. 그 속에서 빛난 것은 애국심이나 영웅주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전투의 승리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이었다. 큰아들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선박을 직접 몰고 전쟁터로 나와 수백 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도슨 선장의 모습은 가슴을 울렸다.

폭격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병사가 아들 피터의 친구 조지를 죽게 했음에도 도슨 선장은 그 군인조차 말없이 용서한다. 그에겐 모든 병사가 아들처럼 소중했으니. 생환(生還)만이 유일한 지상명령이 된 상황에서 병사들은 서로를 마지막 구명보트에서 잔인하게 밀어내는 극한의 생존경쟁을 펼치기도 하지만, 결국 개인의 안위보다 모두의 존엄을 선택한 이들의 용기 덕분에 무려 38만 명의 군인이 구출된다.

“전쟁에서 철수는 승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이번 덩케르크 철수는 명백한 승리입니다.” 적을 항복시키는 것보다 위대한 승리는 바로 40만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40만의 존엄을 지켜낸 것이다. ‘단지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는 자괴감에 빠진 병사들에게 사람들은 일깨워 준다. 그대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쁘며, 당신들은 충분히 위대하다는 것을. 덩케르크 작전의 외피는 ‘철수’지만, 그것은 패배나 후퇴가 아니라 인류의 집단적 존엄의 승리였다.

모두가 집단의 명령에 굴복해 약자들을 짓밟을 때도 단 한 명만이라도 용기를 내어 그 불의와 폭력을 향해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희망은 있다. 어떤 극한상황에서도 우리를 끝내 인간이게 만드는 힘. 그것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승리나 경쟁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자비와 공감, 존엄과 정의에 두는 것이 아닐까. ‘무찔러야 할 적들’과 ‘지켜야 할 우리’를 나누는 삼엄한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 ‘지켜야 할 우리’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자비와 포용이야말로 아직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힘이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