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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만화가 이가라시 미키오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이 번잡하고 변화 많은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다. 수줍은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어주는 아기 해달 보노보노 이야기다. 단순한 그림체와 심심한 유머 속에 가슴 찡한 삶의 메시지를 전해왔던 일본 만화  『보노보노』(거북이북스)가 올해로 연재 31주년을 맞았다. 지난 7월 26일 개막한 제2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라이브 드로잉 행사를 가진 이가라시 미키오(62) 작가를 만났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해질 만큼의 세월. 그러나 필담을 곁들이며 조근조근 이어간 인터뷰에서 그는 『보노보노』를 처음 그릴 때와 같은 여전한 초심을 귀띔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사진=라희찬(STUDIO 706)

이가라시 미키오 / 사진=라희찬(STUDIO 706)

―『보노보노』에서 스스로와 가장 닮은 캐릭터는 누군가요?
“역시 보노보노 아닐까요. 점점 더 닮는 것 같아요. 특히 뭐든 마음대로 상상하는 점이 닮았어요. 결과적으로 무서운 고민에 빠지고는 하죠.”

―어떤 고민인가요?
“예를 들면 일전에 어항을 청소하려고 거북이를 어항 밖에 꺼내놨는데, 갑자기 내 엉덩이를 물어서 깜짝 놀랐어요. 내가 거북이한테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했죠. ‘어항에 너무 오랫동안 가둬놔서 불만이었던 걸까’ 하고요. 어항 밖에 풀어 놓고 키우면 자유롭긴 하겠지만, 그때그때 먹이를 줄 수가 없잖아요. 결국 집어넣고 기르고 있는데, 한참을 고민했어요. 그때 물린 상처가 아직 남아있어요.”

―보노보노 캐릭터를 1980년대 중반 일본의 해달 붐에서 착안했다고요.
“지구의 생명체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며 진화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해달은 거꾸로 육지에서 바다로 간 동물이죠. 고래 같은 다른 포유류가 오랫동안 바다 생활을 해왔다면, 해달은 제일 신입이죠. 그래서 바다 수영도 서툴러요. 은근히 부주의하죠. 그게 재밌었어요.”

―보노보노의 친구들은 다람쥐, 너구리 같이 대부분 작은 동물이에요.
“보통 주인공은 리더십이나 강한 매력이 있는데 보노보노는 연약한 캐릭터잖아요. 큰 의미라기보다, 보노보노와 함께일 때 밸런스가 좋은 동물들을 그렸어요. 또 일본 만화만 봐도, 해달이나 다람쥐, 너구리가 주인공인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무척 귀여운데 말이죠.”

―‘보노보노 어록’(아래 인용구)이 회자될 만큼, 단순하지만 허를 찌르는 에피소드와 대사들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대사를) 쓰려고 할 때 구상이 떠오르죠. 쓰기 전에는 아무생각도 없어요(웃음).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조금 재미있게 전달했을 뿐이에요.”

“나무가 거기 있는 것은 거기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여기에 왔기 때문이다.”(보노보노)

“내가 이긴 게 아니야. 그 녀석이 ‘졌다’고 생각한 거지.” (야옹이 형)

“너부리는 대단하다. 엄청 화를 내도 금방 친절해질 수 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화내지 않고 금방 친절해지는 것보다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보노보노)

“눈에 보이는 것과 지금 아는 것만 이해해도 충분해.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닐 거야. 그래도, 또 다시 눈에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면 충분해. 그건 역시 진실이 아니겠지만.” (범고래 장로님)

―1986년부터 지금까지 연재해온 『보노보노』 시리즈의 정수를 담은 에피소드를 하나만 꼽자면요.
“『보노보노』 4권에 나온 범고래 에피소드에서 아빠를 뒤쫓아 외딴 섬으로 가던 보노보노가 갑자기 ‘아빠가 정말 내 아빠인가’ 생각하는 장면이 나와요. 보노보노의 상상 속에서 아빠는,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죠. 어릴 적 나도 어머니에 대해서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어요.”

―상상의 결론은요?
“안 났죠(웃음). 4권의 그 에피소드도 그래요. 어린 범고래가 장난으로 보노보노 아빠의 머리를 물어서 이빨 자국이 남는데, 그 이빨 자국이 사라지는 걸 보는 순간 보노보노를 괴롭히던 의문도 스르르 사라지죠. 결론을 내기보단, 답을 찾는 동안 의문 자체가 사그라지는, 그런 미묘한 뉘앙스가 이 만화 전체를 대표하는 것 같아요.”

"전부 기분 탓이에요." magazine M 독자분들에게 이가라시 미키오

"전부 기분 탓이에요." magazine M 독자분들에게 이가라시 미키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나요?
“꼭 만화가 아니어도 괜찮다면, 한국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박찬욱, 나홍진, 김기덕,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선 어떤 완벽함이 느껴져요. 박찬욱 감독은 수년 전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극중 TV에 ‘보노보노’ 애니메이션(1995~)이 나오거든요. 박 감독이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해서 미안하다며 연락이 왔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자극적인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고 있어요.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바쁘게 살아가죠. 『보노보노』를 30년 넘게 그리면서 시대와 독자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까요.
“시대가 바뀌었다고 『보노보노』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오히려 나 스스로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감각과 생각, 고민의 변화에서 오는 영향은 있지요.”

―이를테면요?
“신체적인 변화로는 물을 제대로 못 마셔서 흘리거나, 기억을 빨리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만화를 유심히 보면 보노보노뿐 아니라, 주변 캐릭터에 그런 변화들이 투영되고 있어요(웃음).”

―이 번잡한 세상에 보노보노 같이 너그럽고 착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우리가 지레 세상을 번잡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세상이 각박해’ ‘살기 너무 힘들어’ 하는 순간의 말 자체가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험악한 사건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나 같은 경우는 상상을 많이 하고 세상사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살고 있는 센다이에서는 2011년 큰 지진이 일어났죠. 나뿐 아니라 다들 힘들었지만, 고민만 하다보면 고민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떤 상황이든 웃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보노보노』를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쉬운 그림체로 구상했다고 들었어요. 따라 그릴 때의 요령이 있다면요.
“눈의 위치가 가장 중요해요. (길쭉한 동그라미 가운데에 점 두 개를 찍고) 이건 안 되고 (다른 동그라미 양쪽 가장자리에 점 두 개를 찍은 뒤) 이게 맞아요(웃음).”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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