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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3) 조선 3대 시인 박인로는 임진왜란 '종군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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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문중 일도 있다. 회갑을 지나면 가장을 넘어 누구나 한 집안의 어른이자 문중을 이끄는 역할을 준다. 바쁜 현직에 매이느라 한동안 밀쳐 둔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다. 우리의 근본부터 전통문화, 관혼상제 등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등을 그때그때 사례별로 정리할 예정이다. 또 영국의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에 견줄 만한 우리 문화의 정수인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삶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려 한다. <편집자>  

문인(文人) 아닌 무인(武人)도 선비의 전당인 서원(書院)에 위패가 모셔질 수 있을까.

전쟁 나자 붓 차고 의병 활동 #정유재란 후 군문 나와 도학의 길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기슭에는 도계서원(道溪書院)이 있다. 30대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시대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년)의 학덕을 기리는 공간이다. 노계가 누구일까.

영천지역 유림이 노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계서원에 모였다. 서원이 들어선 땅은 후학의 기부로 마련되었다. [사진 영천시]

영천지역 유림이 노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계서원에 모였다. 서원이 들어선 땅은 후학의 기부로 마련되었다. [사진 영천시]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詩歌) 작자로 통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송강과 고산의 시가가 관념적인 사대부 풍이라면 노계는 서민 애환을 노래했다. 권력 주변이 아닌 산골에서 소를 빌려 밭을 가는 백성의 심사를 운율에 담았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 ‘누항사(陋巷詞)’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문재(文才)가 번득인다.

도계서원의 중심은 '구인당'이다. 도(道)를 이룸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박영환 사무국장이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도계서원의 중심은 '구인당'이다. 도(道)를 이룸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박영환 사무국장이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몸 날렵하고 칼 잘 써 

그러나 노계는 50이 넘도록 문인 아닌 무인이었다. 32세에 임진왜란을 만난다. 그의 행장(行狀)에는 “임진년에 의분을 느껴 붓을 던지고 융마(戎馬) 사이를 출입했다. 사람들은 ‘무략(武略)이 있다’고 평가했다. 융마란 군대에서 쓰는 말과 수레를 뜻한다. 전쟁 통에 한가히 붓만 들고 있을 수 없어 의병이 돼 나라를 지킨다.

<노계집> 권3의 4쪽 목판. 노계가 한음 이덕형이 머물던 용진강을 찾아가 지은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새겼다. [사진 영천시]

<노계집> 권3의 4쪽 목판. 노계가 한음 이덕형이 머물던 용진강을 찾아가 지은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새겼다. [사진 영천시]

후손인 박영환(70) 노계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기록으로 보아 노계 선조는 체구는 작았지만 몸이 날렵하고 칼을 잘 쓴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앞장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전장에서 붓을 차고 다니며 ‘종군기자’ 역할을 했다.

1598년 38세 노계는 ‘태평사(太平詞)’란 가사를 짓는다. 정유재란 이듬해다. 그해 늦겨울 부산에 주둔한 왜적이 밤을 틈 타 도망쳤다. 경상좌병사 성윤문은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인솔해 부산으로 달려간다. 당시 박인로는 좌병사의 캠프에 있었다. 좌병사는 박인로에게 사졸을 위로하는 노래를 짓게 한다. 그게 태평사다.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괴화마을 노계의 생가로 추정되는 터. 궁벽한 산골의 삶을 노래한 가사 ‘누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사진 송의호]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괴화마을 노계의 생가로 추정되는 터. 궁벽한 산골의 삶을 노래한 가사 ‘누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사진 송의호]

그리고 이듬해 박인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한다. 39세 늦은 나이에 군문(軍門)에 들어 수문장·선전관 등을 거쳐 조라포(거제도) 만호를 지낸다. 1605년 박인로는 45세에 부산을 방어하는 통주사(統舟師)로 임명된다. 그는 전투함인 판옥선으로 남쪽 변방에 다다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선상탄(船上歎)’이란 노래를 짓는다.

1612년 52세 노계는 인생을 반전시킨다. 그는 종6품 수군 만호 직에서 물러난다. 전란이 끝나자 무인의 길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문무 겸비한 선비

노계는 미관말직을 던지고 고향 영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후회하며 말한다. “남아의 사업은 지극히 큰 것이어서 문장이 오히려 나머지의 일이 되거늘 하물며 궁마(弓馬)에 있어서랴.” 활 쏘고 말 타는 무(武) 대신 더 중요한 도학(道學)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노계 박인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계서원 안 입덕묘(入德廟). ‘입덕’은 『대학』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진 영천시]

노계 박인로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계서원 안 입덕묘(入德廟). ‘입덕’은 『대학』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진 영천시]

노계는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어찌 나이가 많다고 스스로 한계를 지을 것이냐”며 그때부터 공자·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과 주자가 주석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이황을 흠모하기도 했다. 문사이자 선비로서 인생 후반을 연 것이다.

도계서원 앞 못둑 건너편 대랑산 자락에 자리잡은 노계의 묘소. 아버지 박석의 묘 아래에 위치해 있다. [사진 영천시]

도계서원 앞 못둑 건너편 대랑산 자락에 자리잡은 노계의 묘소. 아버지 박석의 묘 아래에 위치해 있다. [사진 영천시]

그러고도 그는 8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7수의 시조와 11편의 가사, 숱한 저작을 남기는 조선의 3대 시가 작자가 됐다. 그는 무인도 문인 만도 아니었다. 도계서원은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선비를 기리는 공간이다.

송의호 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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