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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오페라 보다가 관객들 빵 터졌다, 두 번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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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런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유독 알아듣기 힘든 러시아어 오페라를 두시간 동안 중간 휴식도 없이 한국 청중이 듣다가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리는 일을. 그것도 화려한 무대 장치가 있는 정식 오페라 무대도 아니고, 성악가들이 오케스트라 앞에서 마치 콘서트처럼 노래하는 ‘오페라 콘체르탄테’ 공연에서 말이다.

평창대관령음악제 하이라이트 #한국 초연 프로코피예프 ‘세 개의 …’ #작가 재치와 성악가 연기력 조화

그런 일은 일어났다. 지난달 29일 오후 강원도 평창의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이날 공연은 제14회 평창대관령음악제의 가장 비중 있는 무대였다.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하 ‘오렌지’)의 한국 첫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예프가 이 오페라를 완성한 것은 1919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공연된 건 작곡 98년 만이다. 이날은 러시아 성악가 14명과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다.

지난달 29일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한국 초연 무대. 무대 장치가 없는 콘서트 형식으로 열렸다.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

지난달 29일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한국 초연 무대. 무대 장치가 없는 콘서트 형식으로 열렸다.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

청중의 두드러진 폭소는 두 번 있었다. 웃어야 병이 낫는 왕자가 어이없는 이유로 ‘하하하’ 웃는 장면, 여장을 한 덩치 거대한 요리사가 아름다운 리본을 갖고 싶어서 무릎으로 기며 애교를 떠는 장면이었다. 두 장면 모두 작가의 재치, 작곡가의 드라마에 대한 이해, 성악가의 연기력이라는 삼박자가 맞았다. 그 밖에도 많은 장면에서 청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페라가 지루한 장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공연장에 오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오렌지’는 줄거리만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 같고, 황당하기까지 해서 어떻게 풀어갈지 한심해지는 오페라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한 왕자가 병에 걸려 웃음만이 치료법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어떤 시도에도 웃지 않다가 마녀의 우스꽝스러운 자세에 그만 웃음이 터진다. 마녀는 화가 나서 왕자에게 “오렌지 세 개와 사랑에 빠지리라”는 저주를 남긴다. 왕자는 오렌지를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여장 남자 요리사를 지혜롭게 물리친다. 왕자는 어렵게 구한 오렌지 안에서 아리따운 공주를 발견하고 결혼한다. 왕위를 노리던 자들은 처벌받는다. 짧게 요약한 게 이 정도고, 그 사이에 많은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다. 저주·변신 같은 코드가 줄거리 안에 어지럽게 도열해 있다.

난해한 줄거리에도 청중 반응이 좋았다. 복잡함을 잊을만큼 드라마가 선명했고, 음악은 드라마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속사포 같은 속도로 진행됐다. 보통 오페라에서는 성악가들의 노래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스토리 진행을 유예시키지만, ‘오렌지’를 작곡한 프로코피예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아리아를 넣지 않았고 다만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음악을 복종시켰다. 베르디·푸치니 같은 전통적 선율이 없으면서도 청중이 폭소하며 난해한 줄거리를 헤쳐나가도록 끌고가는 오페라였다.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주제는 러시아 음악이다. 러시아의 주요 작곡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오렌지’의 초연은 이번 음악제의 하이라이트였다. 해외 오페라 무대에서는 꽤 자주 연주되는 작품인데 한국에선 처음 소개했다는 의미가 있다. 오래된 장르인 오페라가 21세기의 청중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처럼 청중이 까르르 웃으며 반응할 수 있는 오페라가 거의 100년 동안 왜 한국 무대에 오르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는 평창 및 강원도 일원에서 8일까지 계속된다.

평창=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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