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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진기자의맛난만남] 축구해설가 신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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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먹던 반찬으로 마음 편하게 차린 밥상이었다. 우선 상대가 월드컵 출전팀이 아니라 부담이 없었다. 선수들은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충분히 보였고 아드보카트 감독도 주방장으로서 자기 맛을 한껏 냈다. 이호와 김남일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김두현을 앞에 두고 4백 수비라인을 정비한 것 등을 보면 재료를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관전평부터 쏟아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특유의 빠른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보지 않고도 경기 상황을 그릴 수 있는 생생한 해설. 마침 축구 대표팀 평가전이 있던 날 그를 만난 덕분이다. 목소리 톤만으로도 경기 결과와 축구장의 열기가 전해진다. 축구해설가 신문선. ‘언어의 달인’답게 그는 축구와 음식,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엮어낸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인연이 깊은 식당이란다. "10여 년 만에 찾은 친구"라며 막국수를 내오는 아주머니에게 활짝 웃어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족발.해물파전.보쌈 등 널찍한 상이 꽉 들어찰 만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온다. 20년 전부터 단골이었는데, 원래 용산에 있던 가게가 십수 년 전 이곳으로 옮겨왔다. 당시에는 이전한 줄 모르고 "식당이 없어졌나 보다"고 아쉬워했다. 재작년 동료들과 이태원에 한국축구연구소를 내면서 다시 찾게 됐다. 우연히 들어온 가게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는 너무 반가워 식당 주인의 손을 덥석 잡았단다. "그동안 못 온 것을 만회할 만큼 자주 왔다. 축구 관계자치고 나와 함께 이곳 막국수를 안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 10년 전 맛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기 중계방송을 진행하면서 곧잘 축구를 음식에 비유하곤 한다. 11명의 선수들이 각각 특징이 다른 재료라면 감독은 이를 하나의 음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주방장이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은 테이블에 앉아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그렇다면 해설가는? "차려진 음식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먹어야 맛을 최대한 즐길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이다. 한 입 먹었는데 어, 이거 늘 먹던 그 맛이 아닐 때가 있다. 그럴 때 왜 음식이 싱거워졌는지, 어떤 재료가 빠졌는지를 재빨리 파악해 전해줘야 한다."

20년 전 그가 프로축구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처음 방송에 데뷔할 때만 해도 해설가는 '찬밥' 신세였단다. 구색 맞추기로 자리는 채웠지만, 대부분 아나운서가 진행을 하고 해설가는 "네, 그렇죠"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틀에 박힌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축구해설을 해보고 싶었다. 치밀한 분석과 정보 수집 못지않게 '재미'도 중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AFKN의 스포츠 중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선수는 실연해서 컨디션이 안 좋다, 저 감독과 선수는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는 등 축구장 안팎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늘어놓더라." 해외 스포츠 중계를 빠짐없이 찾아 보며 '커닝'을 했다. 자신의 해설을 녹음해 끊임없이 들어보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말하는 연습을 했다. 생방송 중 개인적인 의견을 내보내거나, 반말이 섞인 흥분된 말투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불려가기도 부지기수. 이제는 신문선 스타일의 정열적이고 '쇼'같은 해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담백한 보쌈보다는 매콤한 비빔 막국수에 젓가락이 자주 간다. 무난하고 싱거운 음식보다는 맵고 짠, 강한 맛을 내는 음식을 좋아한다. "인생 역시 자극적인 맛이 나게 살았다"고 말한다. 평탄하고 수월한 길보다는 돌부리를 걷어차는 험한 길을 선택해 왔다는 것. 축구계에서 그는 '반골'로 통한다. 축구협회와 선배들을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던져왔기 때문이다. "70년대 학번으로 사회 변혁기를 거쳤고, 묵묵히 운동만 하는 체육계의 '입'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라고 설명한다. 앞으로 방송을 떠나 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겠다는 계획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닫혀 있는 체육계의 분위기를 학교에서부터 열고 싶다. '재미있고 말 잘하는 신문선'에서 '깐깐한 선생'으로 변신할 작정이란다.

종업원을 부르더니 남은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한다. 충분히 먹지 못한 듯하니, 나중에라도 끼니를 채우라고 배려해 준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어느새 약속한 시간을 훨씬 넘겼다. "누구나 물어봤음직한 질문이 하나 남았다"고 그를 붙잡았다. 올해 월드컵에서도 2002년처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미소를 짓는다.

"20년 전 내가 선수로 뛰던 때, 외국에서 경기가 있으면 김치나 고추장을 숨겨가서 몰래 먹었다. 지금은 어떤가. 세계 어느 곳을 가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2002 월드컵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 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 누린 행운과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이제 잊어라. 주방이 바뀌어도 음식 맛은 그대로라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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