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다이닝 가고 럭셔리 고깃집이 왔다

천장엔 큰 소리 내는 연기 흡입구 대신 예술작품 같은 조명이, 테이블 위엔 플라스틱 접시 대신 고급스러운 그릇과 포크·나이프가 놓여있다. 서양식 파인다이닝이라고 착각할만 하지만 이곳은 바로 고깃집이다. ‘담백한 안심을 먹을지, 고소한 채끝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 없다. 고급 스시집의 오마카세(셰프 추천)처럼 주인이 그날그날 선도 좋은 소고기를 골라 내놓기 때문이다. 요즘엔 이처럼 파인다이닝이나 고급 스시집을 닮은 럭셔리 고깃집이 늘고 있다. '이모'라고 불리는 홀 아주머니 대신 전담 셰프가 서빙부터 요리까지 식사의 전 과정을 책임진다. 인제·횡성·양평·음성·제주 등 고기 원산지를 따지는 건 기본이다.

두 팀만 받는 고깃집 

한우 전문점 '수린'은 도산공원을 보며 한우 각 부위를 코스로 즐길 수 있다. 김경록 기자 

2017년 5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맞은편엔 고깃집 ‘수린’이 문을 열었다. 도산공원 주변은 파인다이닝과 고급 스시집이 밀집된 미식의 중심지다. 수린 자리 역시 스타 셰프 임정식과 양지훈이 각각 '정식당'과 '크레아'를 운영했던 바로 그곳이다. 수린은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30개월 미만 1++한우 암소만 판매하는데 메뉴는 한 가지 코스뿐이다. 안심·채끝등심·치마살·부챗살·살치살 등 황성만 대표가 그날그날 선도 좋은 부위 6가지를 골라 차례대로 구워준다.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식사용 테이블 옆에 고기 굽는 별도의 테이블을 마련했다. 고기를 구울 때 연기가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불판엔 하향식 덕트(아래로 공기를 흡입해 밖으로 배출하는 시스템)가 설치돼있다. 저녁에만 3개의 룸을 운영하는데 최소 3인 이상만 예약할 수 있다. 1인 가격은 16만5000원이다.

'수린'의 손님 테이블 옆에는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전용 테이블이 따로 있다. 김경록 기자

앞서 2016년 11월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우본'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두루 경험했던 에드워드 권 셰프가 운영을 맡고 있다. 한국식 소고기 바비큐 전문점이 컨셉트로, 물회·편육·육회 같은 한식 메뉴와 소고기구이를 코스로 구성했다. 메인 메뉴는 안심·갈빗살·꽃등심·채끝·특수부위 등을 내놓는다. 권 셰프는 “경험을 바탕으로 메뉴를 구성해 기존의 고깃집과 차별화했다”며 “한 팀마다 전담 셰프가 고기를 구워주고 고기와 요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손님과 소통한다”고 말했다. 카운터(바)와 룸 각각 1개씩만 있어 점심·저녁 두 팀씩만 예약을 받는다. 이곳 역시 3명 이상만 예약이 가능하다. 어떤 부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데 점심 코스는 5만~6만원선, 저녁은 12만~15만원선이다.

에드워드권 셰프가 운영을 맡은 고깃집 '우본'은 우선 인테리어가 고급스럽다. 카운터와 룸 각 1팀씩 총 2팀만 이용 가능하다. [사진 우본]

파인다이닝 주춤 고급 고깃집은 인기  

셰프가 연예인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미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상승세를 보이던 서양식 파인다이닝이 최근 주춤하고 있다. 김영란법이니 불경기니 탓을 하는데, 이상하게 값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싼 럭셔리 고깃집은 오히려 손님이 넘친다. 서울 광화문 D타워에서 영국 유명 디자이너 톰 딕슨의 작품에 고기를 담아내는 식의 차별화한 서비스를 선보였던 '한육감'은 최근 서울로와 연결된 서울로 테라스몰(대우재단빌딩)에 서울로점을 열었다. 숙성 한우와 함께 묵은지 랍스터, 무쇠솥밭 등을 코스로 낸다. 가격은 D타워점보다 10~20%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6만~7만원대다. 그런데도 분점 역시 예약이 꽉 찰만큼 인기다.

'한육감 서울로점' 입구. 기존 광화문 D타워점보다는 캐주얼한 컨셉트로 꾸몄다. [사진 한육감]

최근 문을 연 고급 고깃집의 공통점은 두세 팀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 개별 룸에서 식사 내내 전담 직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보니 1인분의 가격이 10만~18만원 정도로 비싼 데다 한 번에 2명은 안되고 최소 3명 이상만 예약할 수 있는 등 예약도 까다롭다.
하지만 더운 날씨와 휴가철이 있는 여름을 보통 고깃집이 한산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급 고깃집은 예약이 어려울 만큼 인기다. 한우 오마카세 컨셉트의 ‘모퉁이 우’(청담동)는 테이블당 최소 주문 가격이 정해져있어 1인 코스 가격이 10만원 중반을 넘는데도 두세 달 전엔 예약해야 먹을 수 있다. 수린도 9월 셋째주까지 예약이 거의 다 찼다.
레스토랑 가이드『블루리본』 김은조 편집장은 “한국 사람들이 워낙 소고기구이를 좋아한다"며 "게다가 소득 수준 향상으로 미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소고기 구이문화에도 영향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좋아하는 고기를 보다 좋은 분위기에서 고급스럽게 즐기고 싶은 욕구를 럭셔리 고깃집들이 잘 파고들었다는 얘기다.

브랜드 고기의 탄생

최근 청담동에 문을 연 '붓처리서울' 입구. 투명진열대엔 부위별로 고기가 진열돼 있다. 김경록 기자

고기의 사육 환경과 도축 등 육류 처리 과정의 발전도 고급 고깃집의 탄생을 이끌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의 윤태구 조리팀장은 “과거엔 사육·도축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요즘은 사료·운동량은 물론, 부위에 따라 영양을 축적하게 하는 기술까지 도입돼 질이 높아졌다”며 “고기의 질이 고급화하면서 브랜드로 내세울 고기가 유통되고 또 판매하는 곳들이 문을 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훌륭한 요리의 기본이 좋은 식재료인 것처럼 품질 좋은 고기가 생산되면서 그 고기를 활용한 요리나 문화도 함께 발전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높아진 수준을 제대로 겨냥해 성공한 곳이 ‘본앤브레드’다. 한우유통업체를 운영한 아버지를 둔 정상원 대표는 2015년 서울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부티크 정육점 겸 레스토랑인 본앤브레드를 열었다. 이 레스토랑에서 먹으려면 3~4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본앤브레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이곳 고기를 사용한다는 식당들의 신뢰도도 같이 올라간다. ‘우텐더’가 대표적이다. 2016년 12월 서울 신사동에 문을 연 우텐더 윤정우 대표는 본앤브레드 주방에서 1년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식당을 열었고 지금도 본앤브레드의 1++한우를 받아 사용한다.

산지 마케팅도 활발

'본앤브레드'에서 1년간 일한 윤정우 대표가 그곳 고기를 받아 운영하는 '우텐더'. [사진 중앙포토]

특정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한우 산지를 따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삼원가든과 투뿔등심, 붓처스컷 등을 운영하는 SG다인힐은 최근 서울 청담동에 고기편집숍 컨셉트의 ‘붓처리서울’을 열었다. 매장 입구엔 예쁜 케이크가 들어있을법한 쇼케이스가 있는데, 여기에 소고기가 부위별로, 지역별로 진열돼 있다.
횡성·음성·함양·서귀포 등에서 자란 한우를 쓰는 우본 역시 '새우살은 횡성 한우' 식으로 부위별로 사용하는 소의 산지가 각각 다르다.
달라진 고깃집,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까. 에드워드권 셰프는 “기본적으로 고깃집의 진입 장벽이 낮은 데다 지난해 미쉐린가이드에서 고깃집 '보름쇠'가 별을 받으면서 처음붵 미쉐린가이드 별을 겨냥한 유니크한 스타일의 고깃집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날 것"이라며 "셰프나 업계 전문가들이 고깃집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 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준수 한육감 대표는 “지난 4년 동안 지켜보니 패션 트렌드처럼 외식 트렌드도 빠르게 바뀌더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1년에서 1년 6개월 단위로 새 매장을 여는데 그때마다 컨셉트를 바꾸고 메뉴 구성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1인당 10만~18만원에도 예약 힘들만큼 인기 #부위별 코스로 즐기는 '수린' #딱 2팀만 받는 '우본' #삼원가든·투뿔등심의 '붓처리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