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가범죄 시효 없앤 최종길 교수 배상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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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고등법원이 33년 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중 숨진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유족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고문.조작 등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서도 국가가 소멸시효라는 제도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해 온 데 대해 분명하게 쐐기를 박은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무엇보다 고문 등 국가 범죄의 소멸시효를 사실상 배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동안 법원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불법행위와 관련한 소송에서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민법),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예산회계법)이 지나면 청구권이 없어진다는 규정을 들어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 교수 사건의 1심 재판부도 지난해 1월 이 같은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었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당시 중정이 사건을 치밀하게 조작하고 은폐했음에도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책임 전가라고 못박았다. 유족들로서는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진상을 알 수 없었던 만큼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국제규약을 시효 배제의 또 다른 근거로 제시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고문 등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국제법의 일반법칙을 민사상 소멸시효에도 동일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인권을 짓밟은 사건들의 진상은 철저히 밝혀내 당사자나 유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 이번 판결은 사법부가 소멸시효에 관한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 사법 절차를 통한 과거사 해결이란 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국가기관들이 경쟁이나 하듯 저마다 위원회와 관련법을 만들어 과거사 캐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이는 인권을 의식해서라기보다 현재의 권력을 의식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권을 신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이번 판결이 과거사 문제의 사법적 해결이라는 점에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