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 당시 69세의 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한국 정부에 등록됐다. 42년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다 광복과 함께 고향 땅을 밟은 지 50여 년 만이었다. 그 사이 16살의 꽃 같은 소녀는 노인이 돼 있었다.
종교 후견인, 원정녀 전 사회복지사 #25년 전 할머니 만나 마음 열게 설득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 세상에 알려 #“시원한 인견 이불 선물하려했는데 #부디 다 용서하고 이젠 편히 쉬시길”
이 할머니는 11년 후 미 하원 의회 청문회에 참석해 위안부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한다. 미 하원은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지난 23일 노환으로 타계한 김군자(91) 할머니 이야기다.
김 할머니는 한때 ‘위안부’라는 잔인한 손가락질,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았다. 이런 김 할머니의 마음을 처음 연 주인공이 원정녀(70) 전 강원 정선군 사회복지사다. 그는 천주교 신자인 김 할머니의 종교적 후견인인 대모(代母)이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철 식은 땀을 많이 흘리는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인견 이불을 준비하려 했다는 원 전 사회복지사는 너무도 갑작스런 비보에 영결식 내내 침통한 표정이었다. 묵묵히 김 할머니의 곁을 지킨 원 전 사회복지사를 25일 노제가 엄수된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만났다.
- 김군자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
- “1991년인가 1992년이었다. 한 할머니가 강원 정선군청 민원실을 찾아와 ‘건강보험이 안돼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하는데 어떡하면 좋냐’며 하소연했다. 당시 대면한 직원이 복지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를 소개해줬다. 한눈에 봐도 남루한 행색이었다. 한쪽 귀는 안 들렸고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 할머니의 당시 생활은 어땠나.
- “무작정 집을 찾아가보니 산속 낡은 초가집에서 혼자 지내더라. 살림살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초기 상담은 어려웠다. 무언가 계속 숨기고 망설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족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 어떻게 할머니의 닫힌 마음을 열었나.
- “할머니의 경계심을 없애려 자주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정신대’라고 이야기하더라. 16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중국(지린성 훈춘) 위안소에서 겪었던 몹쓸 일을 조금씩 털어놨다. 가족들에게조차 말 못한 사연이었다. 내가 할머니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까지는 쉽지 않았을 텐데.
- “(생활지원비 등을 받을 수 있는)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하자고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펄쩍 뛰셨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주 두려워했다. 당시 등록을 하려면 증언이 필요했다. 워낙 완강히 거부한데다 녹음기도 흔치 않았다. 할머니 몰래 적은 게 여러 날이다.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1996년) 등록이 이뤄졌다.”
- 할머니에게 나눔의집을 추천한 계기는.
- “비슷한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과 생활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눔의집이 실제 어떤 곳인지 몇 차례 사전 답사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98년부터 나눔의집에서 생활하셨다.”
- 김군자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 “가슴 속에 분노가 많은 분이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 그 분노를 남을 위한 마음으로 바꿨다는 거다. 생활비를 모아 2억5000만원 넘게 기부하지 않으셨나. 한 번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데 한 학생이 오더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가 준 장학금으로 공부한 학생이었다.”
- 할머니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 “모진 고초를 겪으셔서 그런지 평소에도 식은 땀을 많이 흘리셨다. 시원한 인견 이불을 사서 이번주에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 자주 찾아오지 못해 가슴 아프다. 부디 다 용서하고 이젠 편히 쉬시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경기도 광주=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