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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김군자 할머니가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용기 준 숨은 사회복지사

중앙일보

입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군자 할머니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운 원정녀(70.사진 가운데) 전 강원 정선군 사회복지상담사가 김 할머니를 추모하고 있다. 김민욱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군자 할머니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운 원정녀(70.사진 가운데) 전 강원 정선군 사회복지상담사가 김 할머니를 추모하고 있다. 김민욱 기자

1996년 2월 당시 69세의 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한국 정부에 등록됐다. 42년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다 광복과 함께 고향 땅을 밟은 지 50여년만이었다. 그 사이 ‘성장한 죄’ 밖에 없는 16살의 꽃 같은 소녀는 노인이 돼 있었다.

70세 원정녀 강원도 정선군 여성 사회복지사 #1991년 건강보험 상담하며 김군자 할머니와 인연 #세상과 담 쌓은 산골 할머니 설득,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 #김 할머니, 미 하원서 위안부 참상 용기 있는 증언 #"가슴 속 분노 많지만 남 위한 선행 실천 대단한 분" #"땀 많은 할머니께 선물 못한 인견이불 마음 아파" #"부디 다 용서하고 이젠 편히 쉬길 간절히 바랄 뿐” # #

이 할머니는 11년 후 미국 하원 의회 청문회에 참석해 위안부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한다. 미 하원은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House Resolution 121)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지난 23일 노환으로 타계한 김군자(91) 할머니 이야기다.

2009년 '나눔의 집' 방문한 마이클 혼다 미국 하원 의원(사진 왼쪽)이 김군자 할머니와 부둥켜 안고 안부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2009년 '나눔의 집' 방문한 마이클 혼다 미국 하원 의원(사진 왼쪽)이 김군자 할머니와 부둥켜 안고 안부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김 할머니는 과거 한때 ‘위안부’라는 잔인한 손가락질,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았다.
이런 김 할머니의 마음을 처음 연 주인공이 원정녀(70·여·사진) 전 강원 정선군 사회복지사다. 그는 천주교 신자인 김 할머니의 종교적 후견인인 대모(代母)이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철 식은 땀을 많이 흘리는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인견 이불을 준비하려 했다는 원 전 사회복지사는 너무도 갑작스런 비보에 영결식 내내 침통한 표정이었다. 묵묵히 김 할머니의 곁을 지킨 원 전 사회복지사를 25일 노제가 엄수된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만났다.

김군자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
“1991년인가 1992년이었다. 한 할머니가 강원 정선군청 민원실을 찾아와 ‘건강보험이 안돼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하는데 어떻하면 좋냐’며 하소연했다. 당시 대면한 직원이 복지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를 소개해줬다. 한 눈에 봐도 남루한 행색이었다. 한쪽 귀는 안 들렸고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었다.”
할머니의 과거 생활은 어땠나.
“무작정 집을 찾아가보니 산 속 낡은 초가집에서 혼자 지내더라. 살림살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초기 상담은 어려웠다. 무언가 계속 숨기고 망설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족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김군자 할머니 노제 바라보는 고(故) 김순덕 할머니(1921~2004) 흉상. 김민욱 기자

김군자 할머니 노제 바라보는 고(故) 김순덕 할머니(1921~2004) 흉상. 김민욱 기자

어떻게 할머니의 닫힌 마음을 열었나.
“83년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상담사가 됐다. 경험이 쌓이면서 노련해졌다고 해야 하나. (웃음) 경계심을 없애려 자주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정신대’라고 이야기하더라. 16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중국(지린성 훈춘) 위안소에서 겪었던 몹쓸 일을 조금씩 털어놨다. 가족들에게조차 말 못한 사연이었다. 내가 할머니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까지는 쉽지 않았을 텐데.
“(생활지원비 등을 받을 수 있는)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하자고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펄쩍 뛰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시선을 아주 두려워했다. 당시 등록을 하려면 증언이 필요했다. 워낙 완강히 거부한데다 녹음기도 흔하지 않았다. 할머니 몰래 적은 게 여러 날이다.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1996년) 등록이 이뤄졌다.”
할머니가 갑자기 제주도로 떠날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데.
“아마 할머니 주변에 이상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사이를 떼어 놓으려 할머니를 제주도로 보내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몸도 성치 않는 할머니가 걱정돼 간곡히 부탁했고 결국 정선에 남았다. 당시 정선군에서 소년소녀 가장 등을 위해 마련해둔 빈 집이 있었는데 우선 그리로 옮겨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 TV·냉장고도 후원받아 지원했다. 무척 좋아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 생활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집. [중앙포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 생활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집. [중앙포토]

나눔의집을 추천한 계기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할머니들과 생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눔의집이 실제 어떤지 몇 차례 사전 답사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98년부터 나눔의집에서 생활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가슴 속에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건 그 분노를 남을 위한 마음으로 바꿨다는 거다. 생활비를 모아 2억5000만원 넘게 기부하지 않았나. 한 번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데 한 학생이 오더니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가 준 장학금으로 공부한 학생이었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서 엄수된 김군자 할머니 노제. 김민욱 기자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서 엄수된 김군자 할머니 노제. 김민욱 기자

할머니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모진 고초를 겪으셔서 그런지 평소에도 식은 땀을 많이 흘리셨다. 시원한 인견 이불을 사서 이번주에 만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 자주 찾아오지 못해 가슴 아프다. 부디 다 용서하고 이젠 편히 쉬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경기도 광주=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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