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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굿즈를 사느냐고 묻는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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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부장

양성희 문화부장

사춘기 시절 SM 아이돌 팬이었던 딸 아이의 방에는 온갖 ‘굿즈’가 넘쳐났다. 굿즈란 일본 아이돌 팬 사이에서 유래한 연예인 또는 애니메이션 관련 파생상품을 일컫는 말이다. 아이돌 사진이 찍힌 부채·타월·티셔츠·머그잔·달력과 화보 등 방 하나가 굿즈 전시장이었다. SM 공식 굿즈는 기본이고 팬클럽이 만든 굿즈도 엄청나게 많았다. 용돈의 대부분을 쓰면서 자신을 자조적으로 “SM의 노예”라고 했다.

아이돌 팬덤에서 출발 … 문화 전반 확산 #팬심 충족 ‘작은 사치’ 열광 트렌드 맞물려

‘덕질(마니아 활동)’의 상징인 애니메이션 캐릭터 인형(피규어)도 대표적인 굿즈다. 피규어는 가격이 만만찮기 때문에 일정 정도 경제력을 갖춘 성인 남성 ‘덕후’ 수집가가 많다. 이처럼 아이돌 대중문화에 집중됐던 굿즈가 요즘은 출판·영화·전시 등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한마디로 굿즈를 모르고서는 요즘 문화를 얘기하기 힘든 ‘굿즈 전성시대’다. 개념도 광의의 ‘팬 문화상품’ 정도로 커졌다.

가령 미술관에서 전시 관람을 마치면 동선은 자동으로 굿즈 판매대로 이어진다. 책을 사면 으레 문구류·열쇠고리·컵 같은 굿즈를 끼워 준다. 예술영화도 홍보의 필수 요소가 굿즈다. 예술영화 굿즈만 따로 모아 파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출판 굿즈의 선두주자인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굿즈 열풍을 이끈 덕인지 최근 3년간 업계 3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 역전 현상도 벌어졌다. “굿즈를 사니 책이 따라온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얼마 전 지드래곤이 신곡을 USB 형태로 발매했다. 과연 CD처럼 인기 차트 집계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논란이 일었던 것도, 결국 굿즈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사실 디지털음악 환경 속에서 공연과 굿즈 판매 수익이 음반·음원 수익을 넘어선 지는 오래다. 특히 아이돌의 노래는 음원으로 듣고 음반은 사진을 끼워넣고 화려하게 포장해 팬들의 소장 욕구를 겨냥한 굿즈가 돼 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굿즈 열풍이 문화상품에 국한된 건 아니다. 대선운동 기간부터 젊은 층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인 굿즈 시대를 열었다. 팬 사이에 ‘문템’ 혹은 ‘이니굿즈’ 사 모으기 열풍이 한창이다. 대통령 팬카페에 굿즈 게시판이 열리고 여기서 대통령 얼굴 사진이 들어간 달력이나 엽서·배지를 공구(공동구매)하는 식이다.

보다 최근에는 대학 기념품마저 굿즈 대열에 합류했다. 대학 로고 등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점퍼·가방·텀블러 같은 굿즈들이 재학생은 물론이고 졸업생과 외국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다. 한 신문 기사는 “다른 학교 친구들이 우리 굿즈를 예쁘다고 부러워한다. 하나씩 모으다 보면 학교 ‘덕질’ 하는 기분”이라는 한 대학생의 말을 인용했다.

왜 이렇게 굿즈에 열광할까. 그저 아이돌 팬덤의 전유물 같던 굿즈가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는 이유는 뭘까. 굿즈를 구입하는 1차적인 이유는 팬심 충족, 그리고 시각적으로 예뻐서다. 여기에 어차피 불가능한 ‘내 집 마련’ 같은 거창한 소비보다 일상 속 작은 소비에 사정없이 돈을 쓰는 ‘작은 사치’ ‘탕진잼(취미활동에 가진 것을 다 써버리는 재미)’이라는 젊은 층 트렌드가 맞물린다. 필요해서 소비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필요는 없지만 차별화 이미지를 위한 소비도 아니고, 그저 어떤 대상에 대한 열광을 표현하기 위한 소비다. 스타가 있고, 브랜드가 있고, 팬이 있으면 일어나는 소비다(최근에는 스포츠 굿즈 열풍도 상당하다).

아무리 비싸고, 별 쓸모 없고, 또 아무리 구입이 수고스러워도 충성스러운 팬심을 증명하고 덕질에 복무할 수 있다면 모든 걸 감수하는 신종 소비다. 취향과 수집욕이 맞닿으며 ‘팬경제’의 힘을 웅변하는 소비다. 그리고 지금의 예쁜 기념품 수준을 넘어서 먹고 마시고 입는, 일상 소비의 모든 영역으로 얼마든지 확대가 가능한 소비다. 이것이 아마도 문화·연예산업이 노리는 궁극의 소비가 아닐까. 유튜브가 일찍이 “우리는 소비자가 아닌 팬을 원한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양성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