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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꽃' 3부작의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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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들꽃’(2015) ‘스틸 플라워’(2016) 그리고 ‘재꽃’(2017)으로 이어지는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은 정하담이라는 배우이자 극중 캐릭터가 겪는 방황의 연대기이자 떠도는 존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다. 이 영화들의 인물들은 간절히 ‘집’을 원하지만, 그들을 위해 허락된 따스한 방은 없다. 결국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길을 떠나야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들꽃’의 은수(권은수)와 수향(조수향)은 가출 소녀다. 그들은 공터에서 어떤 남자에게 맞고 있는 하담(정하담)을 발견한다. 그들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난 하담. 이때 수향은 하담에게 묻는다. “너, 갈 데 있어?” 이 질문은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설적인 건, 이 영화들은 갈 곳 없는 그들을 통해 정착의 공간인 ‘집’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3부작의 모든 스토리는 집으로 시작해 집으로 끝나며, 집을 구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떠나는 이야기다.

사진1 '들꽃'

사진1 '들꽃'

‘들꽃’에서 세 아이는 모텔촌 골목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자신도 집 나와 봐서 잘 안다며 공짜로 재워 주겠다는 여자. 안락하게 누워 쉴 수 있는 ‘방의 유혹’에 이끌려 모텔 안으로 들어간 세 명의 10대 소녀는 매춘의 위험에 직면하고 그곳을 탈출한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철거 지역의 폐가다(사진 1). 버려진 장소지만, 그곳은 의외로 지낼 만해 보인다.

그러나 은수는 어떻게든 월세방이라도 얻으려 한다.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집이 있어야 주소가 생기고, 그래야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고, 핸드폰도 만들 수 있다.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 신분증이며,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도구이고 토대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끝내 집이 생기지 않는다. 이 모든 현실은 ‘스틸 플라워’의 하담(정하담)에게도 해당된다. ‘꽃’ 3부작은 느슨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명확한 인과 관계를 지닌 연대기라고 보긴 힘들지만 정하담이라는 캐릭터/배우를 고리 삼아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진2 '스틸 플라워'

사진2 '스틸 플라워'

사진3 '스틸 플라워'

사진3 '스틸 플라워'

‘들꽃’에선 16세 가출 소녀였던 하담은 ‘스틸 플라워’에선 22세의 떠돌이가 되어 있다. 하담은 여전히 철거 지역 폐가에서 살고(사진 2), 주소가 없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사진 3). 어렵사리 횟집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돈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하담에겐 작은 자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녀는 탭 댄스를 춘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경계가 사라진다. 하담에겐 길 위가 춤추는 곳이며 집이다. 그러나 하담은 그곳 역시 떠나, 바닷가에서 거센 파도와 직면해야 한다.

3부작의 마지막인 ‘재꽃’은 두 전작과 사뭇 달라 보인다. ‘들꽃’과 ‘스틸 플라워’의 계절은 겨울이었고 그렇기에 하담에게 집은 더욱 절실했다. 공간도 도시(서울과 부산)였고, 시간대도 주로 밤이었다. 대신 ‘재꽃’은 한적한 전원이 배경이며 시간대도 주로 낮이다.

사진4 '재꽃'

사진4 '재꽃'

사진5 '스틸 플라워'

사진5 '스틸 플라워'

영화는 해별(장해금)이라는 아이가 문을 연다. 그런데 익숙한 모습이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소녀(사진 4). ‘스틸 플라워’의 하담(사진 5)을 떠올리게 하는 해별의 모습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연대감을 드러낸다(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헤어스타일과 옷 색깔의 유사성을 지닌다. 그리고 하담은 ‘스틸 플라워’ 때의 그 신발을 해별에게 신긴다).

사진6 '재꽃'

사진6 '재꽃'

한편 ‘재꽃’의 하담(정하담)은 정착했다. 농장에 나가 일하고 집주인 아줌마(정은경)에게 월세도 낸다. 집이 있기에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따스한 방도 생겼다. 이때 해별이 마을에 나타난다. 아이는 자신이 명호(박명훈)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해별이 “이게 집이야?”라고 할 만큼 허름한 집에 홀로 살고 있는 명호. 그는 딸과 살기 위해 초등학교 근처의 새 집을 구해야 한다. 동네 후배 철기(김태희)의 연인인 진경(박현영)은 부동산 중개인. 하지만 그녀는 사기를 치고 명호는 돈을 빼돌린다. 열심히 새 집 단장을 하던 명호(사진 6)는 좌절한다.

더 이상 주인공들이 떠돌 일은 없을 것 같았던 ‘재꽃’에서 역시 하담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곁엔 새별이 있다. 엄마가 떠나고 아빠도 누구인지 불확실한 열한 살 소녀. 하담은 그녀를 통해 과거 호숫가 풀숲에서 엄마에게 버림받았던 과거를 떠올린다.

이 장면은 ‘들꽃’과 ‘스틸 플라워’에서 하담이 왜 떠돌아야 했는지 그 근원을 밝혀주는 신이다. 하담은 독백한다. “새별아 미안해… 난 아직도 그 풀숲에 숨어있는 것 같아.” 이런 연민의 마음은, 생전 처음 보는 해별과 하담이 마치 자매인 것처럼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다. 혹은 캐리어를 들고 ‘홈리스’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교감일 수도 있으며, 조작을 통해서라도 해별에게 명호라는 아버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꽃’ 3부작의 꽃은 화분이나 화단 같은 ‘집’ 없이 길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다. 세 편의 영화에서 하담은 결국 집을 얻지 못하고, 어디가 될지 알 수 없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길을 떠난다. 정착하지 못하는, 아니 정착을 허락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래도 ‘재꽃’에 희망이 있다면 그건 하담에게 동행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진7 '재꽃'

사진7 '재꽃'

사진8 '재꽃'

사진8 '재꽃'

영화의 첫 장면에서 어두운 밤 홀로 자신의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등장했던 해별(사진 4)은, 이제 하담과 함께 밝은 낮에 함께 캐리어를 끌고 간다(사진 7). 그들은 이미 같은 방에서 살았고, 강가의 피크닉(사진 8)에서 자신들만의 집(과 같은 공간)을 가진 바 있다. 집 없이 떠도는 자들의 작은 연대. 항상 영화 마지막에 하담을 홀로 남겨두었던 박석영 감독은 ‘재꽃’에서 그에게 친구를 선사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쏙 빼 닮은 그 아이를 통해 하담은 비로소 엄마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프리랜서 9년 차. 매년 개봉하는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유일한 인생의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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