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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보수원조의 한국보수 처방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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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산업혁명이 휩쓴 1860년대 영국에선 선거법 개혁이 가장 시급한 정치 과제였다. 70%에 달한 농업인구 비율이 20%로 떨어지고 노동자 수가 급증했지만 정치적 권리는 이를 반영하지 못해서다. 참정권 요구 시위가 날로 거세져 소요 진압엔 군대가 동원됐다. 문제를 해결한 건 당시 20년 집권세력인 자유당이 아니다. 지지 기반이 다른 보수당의 리더 벤저민 디즈레일리였다. 집권 직후 그의 정치개혁으로 공장 노동자 300만 명이 새로 선거권을 갖게 됐다.

지키려면 바꾸는 게 영국 보수당 생존법 #영남·진영 강화 버티기로 집권 가능할까

결과는? 이듬해 총선에서 보수당의 대패였다. 그런 보수당을 되살려 재집권의 기반을 만든 것도 야당 지도자 디즈레일리였다. 비법은 사회개혁이었다. 공장과 공공위생, 노조 권리 등 일반 유권자의 일상적인 삶과 관련된 문제를 파고들었다. 굴뚝 청소작업에 대여섯 살짜리 어린이를 쓸 수 없도록 한 굴뚝 소년법 등의 사회개혁 법안에 앞장섰다. 이슈를 선점하고 외연을 넓혀 보수당은 전국적인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다.

불가피한 변화라면 수용해 새 환경에 적응하는 전통은 300년 넘게 이어온 영국 보수당의 DNA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주도한 거의 모든 보수당 지도자가 배신자란 비판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보수당은 그때마다 차세대 지도자를 내세워 위기를 돌파했다. 돈은 없지만 젊고 유능한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가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당 수뇌부가 밀실에서 결정하던 당수 선출 방식의 기득권은 허물었다.

난파 상태인 자유한국당이 배워야 할 선배 정당의 생존 비법이지만 한국당은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버티자는 쪽이다. 엊그제 구성된 신임 지도부 면면을 보면 TK 구심력과 영남화가 오히려 깊어졌다. ‘정치활동 무대를 대구·경북으로 옮겨 봤으면 한다’는 홍준표 대표는 강한 야당과 이념 정당을 내세웠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때가 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게 취임 일성이다. 눈덩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눈사람을 만들기 쉽다는 뜻이 담겼다.

한 방에 훅 가는 게 대한민국 정치다. 상대방의 대형 자살골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 역공 기회는 반드시 생긴다는, 그런 계산법이 한국 정치의 성공 방정식이긴 하다. 원자력발전이든 철도든 혹은 성과연봉제든 오랜 시간과 검토를 거쳐 결정한 기본 정책을 느닷없이 마구 뒤집는 문재인 정부다. 이런 역주행을 보면 높은 지지율이 얼마나 이어질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반사이익이 반드시 한국당으로 향할 거란 보장은 또 뭔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기 위해 영국 보수당은 2005년 30대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영입했다. 그가 5년 뒤 총선에서 노동당을 꺾고 승리한 신의 한 수는 ‘무조건적 반대는 안 한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평범한 상식이었다. 그런 캐머런이 서울을 찾아 ‘극우의 길은 결국 국민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라고 충고했다. “뭔가를 지키려면 그걸 지키기 위해 변해야 한다”면서였다.

자신의 경험담이지만 한국당이 새겨들을 대목이 있다. 강한 이념이나 영남 눈덩이가 집권의 충분 조건은 아니란 함의가 담긴 조언 말이다. 샤이 보수의 마음을 돌리려면 한국당엔 보수의 새 피, 뉴 리더가 우글대야 한다. 그 소굴에서 ‘한국당의 캐머런’이 나와야 한다. 그런 풍토가 우선이다. 그걸 가로막은 게 ‘박근혜당’이고 결과가 궤멸 수준의 보수 몰락이다. 진박 감별사에 진박으로 감별된 인사까지 앞세운 지도부다. 재건의 길마저 버티고 기다리는 데서 찾겠다면 가뭄 만난 천수답과 뭐가 다른가.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