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흑학(厚黑學)』이라는 책이 있다. 리쭝우(李宗吾)란 사람이 1911년 펴낸 것인데, 자신이 중국역사 24사(史)를 모두 읽어보니 남는 건 결국 ‘후흑’ 두 글자더라는 거다. 후흑은 문자 그대로 면후(面厚·뻔뻔함)와 심흑(心黑·음흉함)을 일컫는다. 뻔뻔함과 음흉함이 없으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더란 얘기다. 청나라가 망하고 신중국이 탄생하는 격변기를 풍미한 처세술이거늘, 외려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목을 쓰러뜨리는 바람 같다.
뻔뻔함과 음흉함의 필살기 쓰려면 #인의·도덕 방어술도 갖춰야 했는데 …
여기저기 뻔뻔함과 음흉함이 널리고 걸렸다. 분명 조작된 증거가 대선판을 뒤흔들었음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래서는 위에서 시켰다 하고, 위는 아래에 속았다 한다. 대선후보건 당 대표건 폭로 책임자건 전에는 몰랐고 지금은 나몰라라다. 이것이 이 나라 제2 야당의 ‘면후심흑’이다. 부끄러움은 표를 줬던 20% 유권자들의 몫이다.
제1 야당 역시 후흑이 엷거나 옅지 않다. 국정을 농단한 세력들이 줄줄이 단죄되는 마당에, 그들을 호위 하고 그들에 부역했던 인물들이 사죄의 낯빛 없이 다시 권력을 탐하고 있다. 선거 때 그들을 ‘재활용’했다 이제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용도 폐기하려는 사람이 당 대표가 됐다. 양지를 찾아 가출했다 돌아온 ‘귀족의원’ 13명과 ‘이기는 게 우리 편’인 웰빙 초선들은 눈치만 껌벅이고 있다. 역시 표를 줬던 24% 유권자만 낯이 뜨겁다.
더욱 중요한 건 집권당의 후흑이다. 1년 전 자신들 처지가 까마득한 사람들에게 4년 전 기억을 떠올리라는 게 무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4년 전 ‘인사 참사’ 때 자신들이 던진 비판에 돌아왔던 말들을 자신들 입으로 녹음기처럼 되뇌고 있다. 그런 실패한 인사의 결과로 줍다시피 여당이 됐으면서도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 모르면 멍청함이요 알고도 그러면 뻔뻔함이며 다른 셈이 있다면 음흉함이다.
진짜 중요한 건 청와대의 후흑이다.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그릇된 인사에 대한 합리적 지적에도 눈 하나 꿈쩍이지 않는다. 물론 흠이 있다고 능력까지 없는 건 아니다. ‘심흑’의 대명사인 조조의 말이 그거다. “진평의 행동이 독실했나, 소진이 신의를 지켰나. 하지만 진평은 한나라의 기초를 닦았고 소진은 약한 연나라를 구했다.” (『삼국지』 ‘위서’편) 하지만 선거 전 호기롭게 외쳤던 ‘5대 악(惡)’을 메아리도 없이 거두는 건 뻔뻔함이요, 여론 지지율로 명분을 가름하는 건 음흉함이다.
지지율이라는 게 연예인 인기처럼 거품 같다는 걸 이 정권이 모를 리 없다. 깜박했다면 오래지 않고 멀지 않은 교훈이 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일본 자민당이 엊그제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역사적 참패를 당한 게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닐 터다. 개혁의 길은 뻥 뚫린 고속도로가 아니다. 체증도 있고 낙석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길을 같은 코드의 사람들하고만 달려서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정치적 혁명은 대중이 이런저런 시도에 휩쓸려 녹초가 되면 곧장 끝난다”던 키신저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후흑학』의 결론도 다른 게 아니다. “후흑의 극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뻔뻔하지도 음흉하지도 않다(不厚不黑)’고 느끼게 하는 경지다. 후흑을 행할 때는 반드시 인의(仁義)와 도덕이라는 겉옷을 입어야 한다.” 후흑이 필살기라면 인의도덕은 방어술인 것이다. 바꿔 말해 코드에 탕평의 색깔을 입히는 건 베풂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안전장치란 말이다. 안전띠를 매지 않고 출발하는 새 정부 1기 내각을 보며 기대와 우려가 반반인 게 그래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오니 더더욱 그렇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