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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했던 함양 화과원, 사적지 ‘도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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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함양 백운산 8부 능선에 있는 화과원. 설립자인 백용성 선사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송봉근 기자]

함양 백운산 8부 능선에 있는 화과원. 설립자인백용성 선사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송봉근 기자]

경남 함양군 백운산(해발 1278m)의 해발 1000m 지점에는 ‘봉유대’란 이름의 선방(禪房·면적 132㎡)이 있다. 주위에는 배·밤나무가 우거져 있고 곳곳에 집터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 낮에는 과수원을 일구고 밤에는 참선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금을 중국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댄 ‘화과원(華果院)’이 있던 자리다.

함양군·동국대, 관광개발 등 MOU #민족대표 33인 백용성 선사 창립 #감나무 등 1만여 그루 일구며 참선 #한국전쟁 후 불탄 뒤 현재도 방치 #132㎡ 규모의 선방 봉유대만 남아

2000년 8월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화과원을 국가 사적지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함양군은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의 동국대 회의실에서 ‘화과원 국가사적지 지정을 위한 업무협약’을 했다고 4일 밝혔다. 이 자리에는 동국대 총장 보광스님, 임창호 함양군수, 화과원 국가사적지정추진위원회 김창덕·오일창 위원, 김흥식 함양문화원장, 화과원 관리자 제월 스님, 정승석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앞서 2015년 5월에는 추진위 발기인 대회가 열리고, 그해 7월 국가 사적지정 추진위가 구성됐다.

이번 업무협약으로 함양군과 동국대 등은 앞으로 화과원을 국가사적지로 지정하기 위한 학술연구·학술대회 등을 열기로 했다. 함양군은 화과원을 지역의 대표 문화관광상품으로 만들 계획이다. 사적지정과 관광개발에 서로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화과원을 세운 주인공은 백용성(1864~1940) 선사다. 기미 독립 만세운동(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1927년 화과원을 세웠다. 화과원은 용성 선사가 존경한 중국 육조 혜능대사(638~713)가 한때 머물렀던 중국의 산골짜기 이름이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 16개를 짓고, 면적 148만7600㎡의 과수원에서 감·배·밤나무 1만여 그루를 일궜다. 용성 선사는 제자들에게 “신도들의 봉양에만 의지하면 순수한 의미의 수도가 불가능하니 승려도 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에 따라 스님들은 낮엔 과수원을 돌보고 밤엔 참선을 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도생활을 했다.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 내다 팔기도 했다.

사실 선농일치는 일종의 눈가림이었다. 애초부터 용성 선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과수원을 운영했다. 혹시 모를 일제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당시 화과원에서 생활했던 용성선사의 최측근 표회암 선사(?~1981)는 나중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들 사이에 스승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과일 등을 내다 판 막대한 돈이 온데간데 없어서였다. 돈은 대체로 용성 선사가 갖고 나가 국내 또는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했다.

이런 비밀은 광복 직후에 일부 드러났다. 1945년 12월 12일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5년전 입적한 용성 선사를 모신 서울 종로구 대각사를 방문하면서다. 김구 선생은 당시 만찬 자리에서 “선사께서 독립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던들 임시정부를 운영하지 못할 뻔했다”고 밝혔다.

화과원은 봉유대 등을 제외하곤 지금 모두 숲으로 변했다. 화과원장 혜원 스님은 “한국전쟁 후 공비토벌 과정에서 불탄 뒤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임창호 함양군수는 “백용성 선사 등 당대 선지식인의 훌륭한 업적이 미래세대에 본보기가 될 수 있게 국가사적지 지정에 나섰다”고 말했다.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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