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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살이’ 지쳤다, 집단 목소리 내는 대학원생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한모(54) 교수의 인건비 횡령 사건이 터진 뒤 소속 대학원생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썩이고 있다.

교수 비위에도 개인은 대응 쉽잖아 #고대 총학, 성추행 교수 인권위 진정 #서울대, 카톡방 열어 인권 개선 논의

한 교수는 국가 지원 연구 프로젝트에 제공되는 인건비를 횡령한 혐의로 최근 구속 기소됐다. 30일 학교 측에 따르면 한 교수의 연구실에 있던 대학원생들은 최대한 연구 분야가 유사한 다른 교수의 연구실로 재배정됐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연구실을 바꾼 학생도 있다. BK21사업과 관련해 대학원생들에게 지급되던 인건비도 임시 중단됐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대학원생들은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다. 해당 학부 대학원생 A씨는 “말씀드리기도 좀 그렇다”며 입을 다물었다. 대학원생 B씨는 “제도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 때문”이라고 전했다.

◆“비위 말했다가는 재학 기간 내내 고생”=2012년부터 최근까지 대학원생과 학부생에게 지속적으로 폭언과 성희롱, 부당 업무지시 등을 해 학내 인권센터에 제소된 서울대 H교수는 학교 본부에 ‘정직 3개월’의 징계가 요청돼 있다. 사립학교법상 해임 다음으로 무거운 중징계다.

H교수의 ‘갑질’을 알리는 역할을 했던 대학원생은 “한 학기만 지나면 내가 고발한 사람과 다시 마주치며 지내야 한다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학과 건물 근처에 H교수가 사용할 임시 사무실 공간을 찾고 있다. “정직 처분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H 교수가 사용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원생들은 “징계받은 교수의 사무실이 학과 건물 근처에 마련되면 학생들과의 생활 공간이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교수의 부당행위를 ‘고발’했을 때 주변 인간관계가 모두 끊길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다. 대학원생 C씨는 “대학원생 사이에도 파벌이 있어 신고했다가 비난과 협박에 직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재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교원의 징계 시효는 징계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3년, 예외적인 경우 5년이다. 대학원생들이 박사과정만 4년, 석사과정까지 합치면 6년을 대학원에서 지내야 하는 것에 비해 시효가 짧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에는 이 시효를 각각 5년, 7년으로 늘리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총학생회 중심 결속 가시화=혼자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커지자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총학생회 등 단체를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는 지난달 28일 성추행과 폭언 의혹을 받고 있는 체육학과 모 교수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고 대학 차원의 진상조사와 교수의 사퇴를 요구했다. 서강대 대학원 총학생회는 지난달 15일 ‘대학원생 권리장전 선포식’을 열고 총장과 함께 서명했다. 서울대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을 열어 대학원생 인권 개선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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