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33. ‘찬가’와 ‘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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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히트곡 '미인'이 담긴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이 앨범에 담긴 10곡 중 7곡이 이후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1971년 어느 날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 5분 정도 지나 다시 전화가 왔다. 집권 공화당이었다. 박 대통령을 위한 곡을 만들라고 다시 한번 강력하게 부탁해왔다. 그 역시 거절했다. 그런 노래를 만들 이유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압력을 느끼게 됐다. 내 공연장엔 늘 경찰이 단속을 나왔다. 장발 단속도 시작됐다. 머리가 긴 연예인은 TV에 나갈 수 없게 됐다.

청와대의 요구를 거절한 뒤 바로 쓴 곡이 '아름다운 강산'이다. 그룹 '더 맨' 시절이었다. 당시 MBC에 전오중이란 PD가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하겠다며 출연을 부탁했다.

"장발 단속 때문에 힘듭니다."

"단속 기준이 뭐랍니까?"

"귀만 내놓으면 된답니다."

리드보컬 박광수는 삭발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머리핀으로 머리카락을 넘겨 귀를 내놓았다. 그리고 방송에 출연했다. 그 PD 역시 대단한 분이었다. 머리핀을 꽂은 모습까지 화면에 잡았다. 화면 연출까지 아주 멋지게 처리해 화려하게 곡을 데뷔시켰다. 그 자체가 일종의 반항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통령을 위한 곡은 만들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강산'은 보란듯이 발표하는 게 말이다.

73년 더 맨을 해체하고 국내 최초의 3인조 그룹인 '신중현과 엽전들'을 꾸렸다.

'엽전들'이란 밴드 이름은 일부러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맛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엽전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요즘에야 한국산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상품이지만 그때만 해도 국산은 뭔가 엉성하고 내용이 없었다. "엽전이 다 그렇지 뭐"나 "한심한 게 엽전이다"란 유행어가 그것이었다. 자기를 비하하는 은어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좋다. 내가 엽전이다. 어디 엽전 맛 좀 봐라.'

한국적인 가락만 가지고 한국적 록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6개월 동안 고심해서 곡을 썼다. 엽전들 1집은 한국식 록음악의 전형을 보여준 야심작이었다.

그때 나온 최고의 히트곡이 74년 발표된 '미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흔히 보아왔던 각설이의 타령을 닮은 토속적인 록이다. 미인 원곡은 4분30초를 넘었다. 그래서 '저 여인'이란 곡을 타이틀로 내세워 녹음을 시작했다. 그런데 레코드사에서 "미인을 짧게 만들어 상업적으로 밀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다시 녹음했다. 이 곡은 길거리가 시끌시끌할 정도로 히트했다. 누군가는 미인을 '3000만의 주제가'라고까지 했다. 꼬마부터 노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구두닦이는 '한 번 닦고 두 번 닦고…', 웨이터는 '한 번 나르고 두 번 나르고…'로 바꿔 불렀다. 자기 신세에 맞게 얼마든지 끼워맞출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인기였다. 그 시절 100만 장이나 팔렸으니 말이다. 얼굴을 알아본 동네 꼬마들이 미인을 부르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공교롭게도 최고의 인기를 맛본 나는 곧바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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