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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족 그립다’…콧대 낮춘 압구정 로데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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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만 해도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이었는데 10년쯤 지나자 빌딩이 하나 둘 생겼어요. 또 10년이 지나자 거리는 외제차와 배우들로 북적였고요. 다시 10년이 흐르니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0년, 이젠 상가 곳곳이 비어버렸네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1세대 건물주인 박종록(72) 신구산업 회장의 말이다.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학동 사거리 입구까지 이어지는 ‘ㄴ’자 형태의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80~90년대 돈과 젊음이 모여드는 제1의 ‘핫 플레이스’였다. 공실률이 30%에 이르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93년 개봉한 최민수, 엄정화 주연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포스터.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배경으로 젊은 세대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다. [중앙포토]

93년 개봉한 최민수, 엄정화 주연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포스터.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배경으로 젊은 세대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다. [중앙포토]

로데오라는 이름은 8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버리 힐스의 고급쇼핑가에서 따왔다. 길 건너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이 들어섰고, 우측에는 청담동 명품거리가 조성된 이곳은 이른바 ‘패피’(패션 피플)들의 메카였다. 명동의 유명 디자이너부터 동대문 옷가게 사장들까지 그 시절 ‘옷 좀 안다’는 이들이 집결했다. 상점의 70%는 옷가게였고, 유행을 끌고 좇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겨냥한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88년 맥도널드 1호점과 한국 최초의 원두커피 전문점 ‘쟈뎅’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도 로데오거리였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영화까지 찍었던 곳 #사람은 떠나고 공실은 늘어나 '아, 옛날이여' #지역 건물주 등 30여명 "임대료 30% 낮추자"

 1988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문을 연 맥도날드 1호점의 개점식 모습. [사진 맥도날드코리아]

1988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문을 연 맥도날드 1호점의 개점식 모습. [사진 맥도날드코리아]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창 때의 로데오 거리는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곳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몇몇 상인들은 동대문에서 만원도 안 되는 티셔츠를 떼와 5만~6만원씩 받고 팔았지만, 아무 문제가 안 됐다. 이곳 사람들은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압구정에서 옷을 산다’는 특별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부모가 사 준 고급 외제차를 타고 길거리에서 여성을 헌팅하는 ‘야타족’,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를 건네며 이성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오렌지족 ’ 등이 모두 로데오 거리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송성원 사단법인 압구정 로데오 이사장은 “전국에 있는 포르셰 10대가 모두 압구정 로데오에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고 기억했다.

길이 422m, 폭 10m~22m의 'ㄴ'자 형태 상권인 압구정 로데오 거리 [다음 캡쳐]

길이 422m, 폭 10m~22m의 'ㄴ'자 형태 상권인 압구정 로데오 거리 [다음 캡쳐]

최근 치솟은 부동산 시세를 빗대 자조적으로 쓰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로데오 거리에선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말 1평(3.3㎡)당 70만원에 거래되던 땅값은 90년대 후반부터 실거래가 1억원을 넘어섰고, 월세는 1평당 20만원선으로 뛰었다. 20년 넘게 이 일대에서 활동한 정국진 한양부동산 대표는 “전성기 때는 100평 기준으로 최고 4000만원까지 월세가 올랐고, 권리금은 10평당 2억~3억원 정도로 치솟았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당시 아무리 사업을 잘해 돈을 많이 벌어도 땅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땅 주인들도 예상치 못 한 속도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잘나가던’ 로데오 거리의 황금기는 10년 전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기점으로 호황세가 꺾인데다, 인터넷 사용이 본격화하면서 ‘가성비’ 좋은 쇼핑몰이 대거 등장했다. 기존 옷가게 주인들도 높은 임대료를 내며 버티는 대신 그 무렵 새로 뜨기 시작한 ‘가로수길’, ‘이태원’, ‘홍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레 주변 식당이나 카페의 매출도 줄었다. 로데오 거리에서 10년간 힙합 의류를 판 김모(42)씨는 “2005년부터 손님이 반 토막이 됐는데 월세는 그대로였다.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 3년 전 가게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건물 세 채를 보유 중인 한 건물주는 “세 곳 모두 6개월째 1층이 공실 상태다. 원래는 모두 옷가게가 있던 곳이다”고 말했다. 18일에 세어 보니  ‘ㄴ’자로 꺾어진 로데오 거리의 꼭지점에서 볼 수 있는 ‘임대문의’ 문구가 16개였다. 억대의 권리금도 대부분 사라졌다.

18일 오후 일요일 오후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한산하다. 한때 성업을 이뤘던 1층 상점 곳곳에 임대 문의가 적힌 방이 부착되어 있다. 우상조 기자

18일 오후 일요일 오후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한산하다. 한때 성업을 이뤘던 1층 상점 곳곳에 임대 문의가 적힌 방이 부착되어 있다. 우상조 기자

지난달, 30여명의 지역 건물주와 상인, 강남구청 관계자가 모여 임대료를 30% 가량 낮추기로 합의하는 등 이곳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호현 압구정동 동장은 “공실 기간이 길어지면 건물가격도 떨어져 건물주의 불이익이 크다. 아직 버티는 경우도 있지만, 임대료 인하에 합의하는 건물주가 하나 둘 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는 지난 17일부터 격주로 신인 아이돌 가수 발굴 프로그램인 ‘윙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활기를 불어넣으려 노력하고 있다.

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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