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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정의를 위해 싸웠던 열아홉 또래 소년, 전영진 열사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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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용경·안충원·최종찬

1980년 5월, 독재타도를 외치던 열아홉 소년이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소년의 가족은 소년의 명예회복과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수십 년간 역경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국가는 책임을 회피했고 공권력을 앞세워 이들을 억압하기만 했다. 세월이 흘렀다. 민주화의 꽃망울은 피어올랐고 세상은 소년이 폭도가 아닌 정의를 위해 싸운 열사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37년 전,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광장에 나섰던 열아홉 고(故) 전영진 열사의 삶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를 위해 치러진 대가를 목격하는 일이며 지난 광화문광장에서 보여줬던 정의사회를 향한 열망을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먼저 전 열사의 부모님 전계량(83)·김순희(79)씨와 단짝친구 김향득(55)씨, 고교은사 박석무(79)씨를 인터뷰했다. 단짝친구 정대철(55)씨와는 전화로 인터뷰했고, 해외에 체류 중인 단짝친구 김효석(55)씨와는 아쉽게도 인터뷰하지 못했다.

고(故) 전영진 열사의 어머니 김순희씨.

고(故) 전영진 열사의 어머니 김순희씨.

“우리 아들 참 잘생겼지라.”

어머니 김순희(79)씨가 전영진 열사의 영정사진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 소년의 모습은 짧은 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어머니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사진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시몬(전영진 열사의 세례명)은 착한 아들이었지. 아니 효자였지. 엄마가 눈에 안 보이면 그렇게 엄마를 불렀지. 착하고, 잘생기고, 성실해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자식인데 세상을 잘 못 만났지.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못이 박혀서 잊히지가 않아. 내가 죽어야지 모든 것이 잊힐 것 같아. 진짜로 성실하고 나무랄 데 없는 우리 아들. 뭣이 어쩐다고 아무 죄도 없는 공부만 했던 우리 아들을 죽여 버렸을까.”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던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취재에 나섰던 우리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37년 동안 진실을 밝혀내려고 독기 품고 투쟁했어.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추모식을 위해 회의하고 또 회의했지. 또 서울대, 연세대, 한국해양대 등 전국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5.18에 관해 증언을 해나갔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경찰과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방해했지. 추모식에 쓸 음식조차 지역의 노인들을 동원해 수탈하더라고.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어. 그래서 매일같이 금남로로 달려가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쳤어.”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는 전두환 타도를 외치다 경찰서로 끌려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어. 그리고 호송차에 실려 광주경찰서로 끌려갔지. 끌려가는 동안 경찰에게 '내가 너희들한테 기가 죽을 것 같으냐. 대한민국 경찰이면 살인마 전두환을 광주 시민 앞에 바친 후에 나를 잡아가라'고 소리쳤지. 경찰들도 이런 독한 여자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어.”

1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며 어머니는 아들 또래인 우리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부모가 되기 싫어 죽을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았어. 세월이 지나니깐 내 자식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지. 이렇게 찾아와 우리 시몬이 이야기를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으니 말이야. 아이고, 고맙고 또 고맙네.”

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군이 대치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군이 대치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탁구를 좋아하던, 평범했던 열아홉 소년

우리는 지난달 13일, 금남로의 한 갤러리에서 전 열사의 단짝친구 김향득(55, 사진작가)씨를 만났다. 故 전영진 열사의 학생시절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친구이었냐”는 질문에 김씨는 “탁구를 좋아하던 맑고 순수했던 친구”라고 설명하며 말문을 열었다.

“탁구를 그렇게나 좋아했어요. 매일같이 학교가 끝나면 곧장 탁구장으로 향했죠. 영진이의 프로 같은 서브, 기가 막혔어요. 아무도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요. 정말 영진이 한 번 이겨보는 것이 소원 아닌 소원이었어요.”

김 씨는 전 열사의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의 이면에 활발함이 묻어났다고 말한다.

“영진이는 평소에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반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그 때가 1학년 소풍 날이었는데, 장기자랑 시간이 찾아왔어요. 영진이가 가장 먼저 나서서 당시 유행했던 고고(GO-GO)춤을 추더군요. 평소에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 나오는 존 트라볼타의 춤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나름 멋있게 소화했죠. 그 때 신난다고 같이 춤추고 그랬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네요.”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조용하던 전 열사의 마음에 정의와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 튼 이유가 궁금했다.

“영진이가 민주의식을 갖게 된 데에는 영어를 가르치던 박석무 선생님의 영향이 커요.

박 선생님은 학생들이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셨어요. 매번 ‘진리는 연착하는 기차다’ 라며 김지하의 시집이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좋은 책들을 추천해주셨죠. 우리는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영진이도 그랬고요.”

전영진 열사가 쓰던 교과서. 교과서 한편에 그려져 있는 낙서가 눈에 띈다.

전영진 열사가 쓰던 교과서. 교과서 한편에 그려져 있는 낙서가 눈에 띈다.

전 열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유신체제로 자유가 억압받던 시기였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학교로 이어졌다. 전 열사의 흔적을 찾아 만난 박석무 선생님(74, 현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故 전영진 열사를 회상하며 우리에게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79년 10월이었습니다. 대동고에서 학원자율화를 주장하는 교내시위가 열렸어요. 당시 영진이는 문과반 친구들과 함께 두발자유화와 교련(군사훈련)반대를 주장하며 교내시위에 동참했고 운동장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교문 밖에는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저를 비롯한 모든 선생님이 학생들을 만류했어요. 학생들이 다칠까 걱정됐었죠. 하지만 시위는 점심을 넘어 저녁까지 이어졌습니다. 다음 날 학교는 시위에 가담한 학생을 강력히 처벌하려 했어요. 하지만 저는 윤광장·박행삼 선생님과 함께 처벌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는 10.26 사건이 발생해 아이들의 처벌은 일단락되었죠. 그때, 영진이를 다시 봤어요. 평소 조용해 시위에 참여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영화 ‘화려한 휴가’ 중 故 전영진 열사를 모티프로 한 진우(이준기)의 모습.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 ‘화려한 휴가’ 중 故 전영진 열사를 모티프로 한 진우(이준기)의 모습. [사진=CJ엔터테인먼트]

“어머니,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

취재를 마친 우리는 전 열사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10대가 전 열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인터뷰 내용과 5.18기념재단에서 작성한 ‘5.18 당시 광주대동고 교내항쟁’ 자료를 바탕으로 전 열사의 마지막 3일을, 전 열사의 시점으로 재구성하기로 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5월이었어. 갑자기 무장을 한 군인들이 나타나더라고. 그들은 총과 곤봉을 들고 시민들에게 위협을 가했어. 폭행은 물론이고 강제연행까지 일삼았지. 분노가 치밀었어.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어. 다음 날, 수업 중에 한 친구가 소리쳤어.

“선생님, 수업을 꼭 하실랍니까. 우리 국민을 총으로 다 죽이고 있는데 수업을 꼭 하실랍니까.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죽어 가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눈물을 흘렸어. 울분을 참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의자와 책상을 부숴 계엄군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었어.

“민주학생 합세하라! 민주교사 합세하라!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

‘투사의 노래’, ‘울밑에선 봉선화’, ‘정의가’를 부르며 교문으로 향했어. 그런데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었고 교문 밖에는 계엄군이 있었지. 순간 박행삼 선생님이 외쳤어.

“여러분의 심정은 내가 충분히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이 나간다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에게 몸을 거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귀중합니다. 그래도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밟고 가십시오.”

나는 땅을 치며 통곡했어.

그런데 얼마 지났을까, 학교에서 조기 하교를 지시하더라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친구도 있었어. 하지만 우리 집에는 차가 없어 걸어가야만 했지.

순간 계엄군을 마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아치기 시작했어. 얼마 걸었을까, 도로 한복판에서 계엄군과 마주쳐 버렸지. 계엄군은 나를 붙잡고 막무가내로 때리기 시작했어. 공포감에 정신이 혼미해졌지. 동시에 이러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계엄군을 따돌리고 집으로 달려갔지. 러닝셔츠가 땀에 푹 젖을 정도로.

광주 학생 6천여명은 80년 5월 광주역 광장에 집결, 전남도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인 뒤 도청 앞 분수대에 둘러앉아 계엄해제 등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했다. [사진=중앙포토]

광주 학생 6천여명은 80년 5월 광주역 광장에 집결, 전남도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인 뒤 도청 앞 분수대에 둘러앉아 계엄해제 등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했다. [사진=중앙포토]

다음 날인 5월 21일, 아침햇살이 유난히도 따스했던 날이었어. 나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부모님께 금남로에 꼭 가봐야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온 가족이 나서서 나를 말렸지. 마루를 왔다 갔다 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어.

잠시 후 나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어머니께서 불안했는지 “시몬(전영진 열사의 세례명), 제발 나가지 마라. 네가 지금 나가면 파리 목숨이다. 지금 네가 살아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라”고 말씀하셨지.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어.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에게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고 말하곤 금남로로 향해 달려갔어. 그것도 친구도 없이 홀몸으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목청껏 외쳤어.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령을 철회하라.”

얼마 지났을까,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전당) 시계탑의 시계바늘이 1로 향했어.

동시에 전남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지.

그때,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기 시작했어.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어. 하지만 광주노동청(광주광역시 금남로4가 위치) 앞에서 계엄군의 총탄을 맞았어. 결국 난 5월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어.

전영진 열사의 묘, 소년은 편히 누워있을까.

전영진 열사의 묘, 소년은 편히 누워있을까.

소년, 그리고 촛불 든 10대

지난 겨울 촛불집회 때 수많은 10대가 광장으로 뛰어나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뭘 안다고 설치냐”라며 나무라던 일부 기성세대의 삐딱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광장에 모여 ‘만 18세 참정권, 나이와 관계없이 정당가입과 선거운동 등의 정치적 자유 보장,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학칙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사진=임소희 TONG청소년기자]

[사진=임소희 TONG청소년기자]

우리는 점점 더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이다. ‘대학입시’라는 현실의 틀에 갇혀 살아도 과거 우리와 같았던 소년이 지킨 민주주의 역사가 퇴보하지 않도록.

글·사진=안충원, 취재=신용경·최종찬(영암고 2) TONG청소년기자 월출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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