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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대표 만화가 지피 "사랑만 있다면 만화는 없어도 된다"

중앙일보

입력

“중요한 건 아이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만화는 없어도 됩니다.”

'아들의 땅' 소개한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 첫 방한 #2017 국제서울도서전 참가차 방문해 강연 #2006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 받아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 [사진 북레시피]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 [사진 북레시피]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본명 잔 알폰조 파치노티ㆍ54ㆍ사진)는 “만화 없는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9살배기 아이 아빠의 말에 이같이 답했다. 만화를 본업으로 하는 작가이지만, 만화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답할만큼 지피의 만화가 지향하는 지점은 명확했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는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만화가 지피가 처음 한국을 찾았다. 14일 개최된 2017 국제서울도서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날 오후 열린 강연회(주최 주한이탈리아문화원·북레시피)에서 지피는 지난달 말 한국에 소개된 작품 ‘아들의 땅’에 대해 설명했다. ‘아들의 땅’은 2007년 ‘창고 라이브’ 이후 국내에 소개된 지피의 두 번째 작품이다.

‘아들의 땅’은 지구 종말 이후 살아남은 아버지와 두 아들이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시와 같은 세상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사랑이나 감정은 물론 어떠한 문명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지피는 “이전의 작품들은 자전적 이야기와 경험을 녹였지만 이번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려 했다”며 “종말 이후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종말의 이유를 이야기에 담지 않은 건 독자들에게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의 자유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지피의 그래픽노블 '아들의 땅'. '아들의 땅'은 종말 이후 살아남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진 북레시피]

지피의 그래픽노블 '아들의 땅'. '아들의 땅'은 종말 이후 살아남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진 북레시피]

‘아들의 땅’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않지만 자신은 매일 일기를 써 내려 간다. 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뒤 아이들은 이 일기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모험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랑과 배려, 인간성을 배운다. 아버지의 무자비한 모습은 결국 “강하게 살아남길 바라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마지막에는 아이들도 결국 사랑을 깨닫게 되는 데에서 작가는 사랑만이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게 한다고 강조한다. 지피는 “만화를 그릴 때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와 이야기하려 노력하는 데에서 메시지가 배어나온다"며 "아버지라는 인물은 사랑 그 자체를 상징한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유럽 만화는 생소하다. 더군다나 만화가 지피에 대해서는 더욱 낯설어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지피의 작품은 예술성이 높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젤로 조에 주한이탈리아문화원장은 “이탈리아 만화는 유럽에서 질적으로는 1위, 양적으로는 프랑스에 이어 2위 수준”라며 “이런 이탈리아 만화계에서 지피는 데뷔 직후부터 성공한 작가였으며 드로잉 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 [사진 북레시피]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 [사진 북레시피]

2001년 만화 단편집을 그리기 시작한 지피는 ‘전쟁 이야기를 위한 노트’를 통해 2005년 르네 고시니상과 이듬해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았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의 최고 작품상은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상이 높다. 또 2006년에는 작품 ‘무죄(The innocent)’로 미국의 권위있는 만화상 중 하나인 아이스너상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4년 ‘하나의 이야기’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최고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 최종후보에 올라 화제가 됐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전쟁 이야기를 위한 노트’는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피는 “당시 이라크에서 전쟁이 벌어져 이탈리아에서도 파병을 해야했다”며 “그런데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때 지피는 의문을 갖게 됐다고 한다. 물리적인 거리가 어느 정도쯤 돼야 전쟁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할까. 지피는 “외국에 출판될 때 책 속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곳의 지명을 적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전쟁이 어디에서 발발하더라도 결국 전쟁은 우리가 사는 이 곳에서 일어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박석환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콘텐츠과 교수는 “미국ㆍ한국ㆍ일본의 만화가 스토리 중심이라면 유럽만화는 그림 한 컷 한 컷에도 의미를 담아 회화적으로 정성스럽게 표현한다”며 “지피는 그런 회화적 표현에 문학성 짙은 스토리를 입힌 작가"라고 말했다. 지피는 향후 작품 계획에 대해 “작업을 할 때 보통 계획을 세우고 일하지 않는다”며 “그저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오면, 그것을 그릴 뿐이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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