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16년 전 ‘이 양반’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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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대중(DJ)과 조지 W 부시의 한·미 정상회담 5시간 전인 2001년 3월 7일 새벽 5시.

재앙이었던 DJ-부시 회담 상황과 비슷 #‘얻기’보다 ‘판 깨지 않는’ 회담 주력해야

격노한 부시의 전화는 ‘재앙’의 예고편이었다. 뉴욕타임스 백악관 담당 기자 피터 베이커가 출간한 『불의 날들』에 묘사된 당시 상황.

“워싱턴포스트 읽어봤어요?”(부시)

“아니요, 대통령님. 아직….”(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당장 나가서 신문 가져와요! (침묵) 자, 봤죠? 누가 이 문제 해결할까요. 내가 할까요, 당신이 할래요?”(부시)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부시, 클린턴 전 정권의 북한과의 미사일 회담 방침 계승키로!’.

전날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DJ의 회담이 문제였다. 파월은 이 자리에서 “클린턴 정권의 대북 대화 기조 중 계승할 것은 이어 가겠다”고 했다. DJ가 간절히 바라던 한마디였다. 하지만 부시가 바라던 건 아니었다.

40일 전 취임 축하 통화 때부터 전조는 있었다. 양국 정부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고 발표했다. 사실은 달랐다.

“DJ가 대북 포용정책을 장황하게 설명하자 부시는 손으로 송화구를 막으며 옆에 있던 내게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기 힘들군’이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찰스 프리처드 대북특사, 『실패한 외교』)

DJ는 ‘마이 웨이’를 고집했다.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낸 뒤 장황하게 햇볕정책을 강의했다. 부시는 기겁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DJ가 했던 것이다. 부시는 공동회견장에서 보란 듯 북한을 비난했다. 부시는 회견 도중 아버지뻘인 DJ를 ‘이 양반(this man)’이라 불렀다.

희한한 것은 양국의 엇갈린 평가였다. 우리 언론은 ‘부시, DJ 햇볕정책 전폭 지지’란 제목을 달고 성과를 부각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부시는 DJ에 퇴짜를 놨다”고 썼다. 당시 회담 분위기를 제대로 읽었던 것이다. 이후 상황은 알려진 대로다. 부시는 “북한은 악의 축”이라며 햇볕정책을 멀리했다.

16년 전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문재인-트럼프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우리 외교당국이 반면교사로 복기하고 있는 회담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 상황은 당시와 너무 흡사하다.

첫째, 개인 스타일. 트럼프, 부시는 닮은꼴이다. 직설적이고 참모 조언보다 자신의 당일 기분에 좌우된다. 부시는 WP 기사에 꼭지가 돌아 판을 깼다. 트럼프도 코미 FBI 전 국장 증언, 탄핵수사 임박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상황. 누구도 트럼프 입에서 당일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둘째, 대화 스타일. 문 대통령은 DJ처럼 대화가 진지하다. 반면 트럼프는 부시 못지않게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걸 못 견뎌 한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지혜를 내면 피할 수 있다.

셋째, 회담 전 분위기. 미묘하게 16년 전처럼 돌아가고 있다. 2001년 DJ는 남-북-미 대화기조가 깨질까봐 조바심을 냈다. 아니 욕심을 냈다. 파월 장관 등 대화파 라인을 파고들어 ‘완벽한 결과’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강경파 부통령 딕 체니에게 기울던 부시의 노여움을 샀다. 2017년 트럼프는 강경파에 둘러싸여 있다. 한데 우리 외교는 말 통하는 인사들만 골라 열심히 만나고 있다. 그리고 “통화 분위기가 좋았다”고 강조한다. 욕심도 마찬가지. 신정권은 사드를 외교카드 삼아 ‘공격’ 좀 해 보려다 회담 직전 헛발질을 했다. 어설프게 ‘환경영향평가 1~2년’ 운운하는 바람에 이젠 ‘사드 퇴짜’ ‘사드 선불 청구서’를 맞을지 모르는 입장이 돼 버렸다. 16년 전 부시의 “이자가 누구야?” “이 양반”과 같은 불신과 분노의 표출이 없길 바랄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16년 전 회담도 발표문은 100점에 가까웠지만 내막은 재앙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단번에 얻어내려 하지 말자. 갈 길이 먼 만큼 이번에는 판을 깨지 않는 데 만족하자.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