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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타박타박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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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찾는 여행자의 좌표는 중부에 방점이 찍힌다. 이탈리아 반도 중간 즈음에 이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도시가 몰려 있어서다. 모든 길이 통하는 도시 ‘로마’와 르네상스 거장의 주 무대 ‘피렌체’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점프하듯 여행하는 게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의 여행 루트지만 두 도시 사이에는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여행지가 무수하다. 현지인도 평생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한다는 소도시를 찾아 기차로 1시간 30분이면 닿을 로마에서 피렌체 사이를 부러 느릿느릿 여행했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주, 토스카나(Toscana)주에서 대도시를 건너뛰듯 여행을 했던 때 보이지 않던 이탈리아를 만났다.
이탈리아=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성 프란치스코 흔적 깃든 아시시 #와인과 탑의 도시 산 지미냐노 #피렌체 못지 않은 예술 도시 시에나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테마파크

아시시는 빈자를 품은 성인 프란치스코의 흔적을 좇으려는 순례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시다. 도시의 랜드마크 성 프란치스코 성당. 하얀 대리석이 성스러운 마을 분위기와 꼭 들어맞는다.

아시시는 빈자를 품은 성인 프란치스코의 흔적을 좇으려는 순례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시다. 도시의 랜드마크 성 프란치스코 성당. 하얀 대리석이 성스러운 마을 분위기와 꼭 들어맞는다.

로마를 품고 있는 라치오(Lazio)주와 경계를 잇댄 움브리아주는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농경지대다. 밀밭과 올리브나무가 빚어내는 차장 밖 풍경을 감상하며 로마에서 3시간 차를 타고 이동한 끝에 평야 한 가운데 불쑥 올라선 수바시오(1280m)산을 마닥뜨렸다. 수바시오산 중턱의 중세도시 아시시(Assisi)가 여행의 첫 목적지였다. 아시시로 향하는 길은 움브리아 경치 덕에 절로 힐링이 되는 코스였다.
아시시는 ‘가장 예수를 닮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가 나고, 활동하고, 잠든 도시다. 소탈한 행보로 인기가 높은 현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로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차용했다. 여행에 동행한 권순찬 가이드는 “현 266대 교황 이전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한 교황은 없었다”고 일러줬다. 교황은 재위 기간 중 사용할 이름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견딜 교황이 많지 않았을 거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재물을 버리고 청렴한 생활을 했던 프란치스코는 현재도 유의미한 교훈을 주는 성자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로 먹고 사는 도시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가는 길 상점가에서 성인을 이미지로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로 먹고 사는 도시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가는 길 상점가에서 성인을 이미지로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도시를 활보하는 수도사나 수녀를 만나는 것도 아시시 여행의 묘미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는 세 개의 매듭이 달린 허리띠를 차고 있다. 매듭은 청빈, 복종, 순결을 뜻한다.

도시를 활보하는 수도사나 수녀를 만나는 것도 아시시 여행의 묘미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는 세 개의 매듭이 달린 허리띠를 차고 있다. 매듭은 청빈, 복종, 순결을 뜻한다.

아시시는 오직 프란치스코를 기억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마을 어귀서부터 이어진 골목길 양옆으로 프란체스코를 그린 그림이나 성물을 파는 조그만 가게가 늘어섰다. 골목길을 따라 프란치스코의 생가, 프란치스코를 따랐던 성녀 글라라를 기린 성당 등을 보는 게 아시시 여행의 주된 일정이다. 마을 꼭대기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데 한 두 시간이면 족했다.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지만 대도시처럼 북적이거나 떠들썩함이 없었다. 성당과 광장에도 조용히 묵상과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 분위기에 뒤섞여 침묵하는 것이야 말로 평온한 도시에 녹아들 수 있는 최고의 여행법이었다.

와인의 도시, 탑의 도시

포도밭과 올리브밭 사이사이에 사이프러스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토스카나 풍경. 

포도밭과 올리브밭 사이사이에 사이프러스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토스카나 풍경.

토스카나 여행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

토스카나 여행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

라치오주의 북동쪽 경계 너머에 움브리아주가 있고, 북서쪽에는 토스카나주가 붙어있다. 둥그스름한 구릉 지대에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솟아있는 모습은 토스카나를 상징하는 전원적인 풍경이다. 이탈리아인이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도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별장을 지은 도시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가 바로 토스카나에 자리한다.
현지인이 산 지미냐노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와인’이다. 평야는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땅은 산지와 구릉 지대로 이뤄진 토스카나의 지형을 산 지미냐노도 그대로 본뜨고 있는데, 도시 주변 비탈면은 온통 포도밭으로 채워졌다. 이탈리아의 보르도(프랑스 와인 생산지)로 통하는 산 지미냐노를 대표하는 포도 품종은 베르나챠(vernaccia)다. 베르나챠로 빚은 화이트 와인을 맛보고 포도밭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이 산 지미냐노 여행의 최고 유희라 볼 수 있다.

탑집 사이사이로 조용한 골목 산책을 할 수 있는 산 지미냐노.

탑집 사이사이로 조용한 골목 산책을 할 수 있는 산 지미냐노.

산 지미냐노의 탑집은 높이 70m에 이른다. 중세 귀족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산 지미냐노에 탑집을 올렸다.

산 지미냐노의 탑집은 높이 70m에 이른다. 중세 귀족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산 지미냐노에 탑집을 올렸다.

산 지미냐노는 영국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이 반드시 들르는 중간 기착지로 12~13세기 중세시대 번영을 누린 도시였다. 지금은 한적한 풍광이지만 도시의 과거 영화를 짐작하게 하는 건축물이 남아있다. 중세인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탑집이다. 외부에서 내부를 짐작할 수 없게 창문을 없앤 탑집은 귀족의 집으로 요새로 쓰였다. 2㎢ 남짓한 시가지에 100기에 가까운 탑이 몰려있어 ‘중세 맨해튼’으로 불렸던 산 지미냐노에는 현재 10여 기의 탑이 남아 1000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탑집에 올라 토스카나의 목가적인 풍경을 내려다보니 눈이 절로 시원해졌다.

영국에서부터 로마로 이어지는 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프랑스를 지나는 길)를 알리는 표지판.

영국에서부터 로마로 이어지는 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프랑스를 지나는 길)를 알리는 표지판.

예술가의 순례지

벽돌로 만든 건물이 많은 시에나를 상징하는 색깔은 갈색이다. 시에나의 색감은 '시에나 브라운'이라는 말로도 통용된다. 색채 연구소 팬톤은 6가지 갈색 계열 색상에 '시에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벽돌로 만든 건물이 많은 시에나를 상징하는 색깔은 갈색이다. 시에나의 색감은 '시에나 브라운'이라는 말로도 통용된다. 색채 연구소 팬톤은 6가지 갈색 계열 색상에 '시에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에나 원경. 삐죽 솟은 종탑(왼쪽)과 돔 지붕을 얹은 시에나 대성당(오른쪽)이 한눈에 보인다.

시에나 원경. 삐죽 솟은 종탑(왼쪽)과 돔 지붕을 얹은 시에나 대성당(오른쪽)이 한눈에 보인다.

토스카나주 소도시 시에나(Siena)는 피렌체와 가깝고도 먼 도시다. 두 도시는 차로 30분이면 닿을 정도로 근접해 있지만 중세시대부터 토스카나의 주도권을 놓고 숫하게 전쟁을 치른 탓에 지금가지도 라이벌 의식이 남아 있다. 시에나와 피렌체는 모든 분야에서 경쟁관계였고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3세기 피렌체를 앞서기 위해 시에나 시는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바로 토스카나 중세 예술의 집성체로 불리는 시에나 대성당이다.
로마에만 600개의 성당이 있으니, 성당이라고 해봤자 별반 다를 게 있을까 싶었지만 시에나 대성당은 이 성당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를 찾아올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질 법했다. 흰색과 검은색 대리석을 교차로 쌓아 스트라이프 무늬를 넣은 성당 내부, 녹색 분홍색 흰색 대리석으로 꽃처럼 만든 성당 파사드(정면)가 화려했다.

시에나 대성당 바닥의 돌 그림. 40명의 석공이 매달려 56개의 모자이크화를 완성했다.

시에나 대성당 바닥의 돌 그림. 40명의 석공이 매달려 56개의 모자이크화를 완성했다.

시에나 대성당에 딸린 피콜로미니 도서관.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핀투리키오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시에나 대성당에 딸린 피콜로미니 도서관.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핀투리키오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시에나 대성당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은 벽면이나 천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바닥에 놓였다. 색색의 대리석을 정교하게 잘라 모자이크로 만든 56개의 돌 그림이다. 1300년대 부터 1500년대까지 2세기에 걸쳐 제작됐는데, 외곽선을 끌로 일일이 파내는 상감 기법으로 만든 그림은 인물의 얼굴 주름, 옷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해놨다. 바티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성당에 프레스코화를 남기기 전 미켈란젤로가 시에나 대성당을 찾아와 영감을 얻어갔다는 게 어렴풋이 이해되기도 했다.
성당을 빠져나와 도시의 중심 광장 캄포 광장에 누웠다. 고대 로마 시대 공회당이었던 캄포 광장은 오늘날 휴식처로 변모했다. 그늘에서 젤라토를 먹는 여행객들, 토스카나의 강렬한 햇볕을 즐기는 도심 선탠족도 있었다. 시간이 켜켜이 누적된 도시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냈다.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 피사를 상징하는 피사의 사탑.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 피사를 상징하는 피사의 사탑.

◇여행정보=이탈리아 중부 소도시는 로마나 피렌체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자유여행객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는 도시다. 하지만 하루 운항하는 편수가 적고 기차역이 도심과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중부 소도시를 여행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출발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다. 유로자전거나라(romabike.eurobike.kr)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아씨씨·스펠로, 토스카나주 시에나·산지미냐노·피사 등 소도시를 둘러보는 3박4일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로마에서 출발해 피렌체에서 끝나 앞뒤로 자유여행 일정을 붙이기 좋다. 이탈리아 정부 공인 가이드가 동행한다. 매주 일요일 출발. 1인 470유로(약 59만원), 예약금 20만원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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