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예능과 만난 인문학, 솔깃하긴 한데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 나와 ‘잡학 수다’를 펴는 tvN 예능 ‘알쓸신잡’

“이 방송 괜찮겠니? 진심으로 걱정돼서 얘기하는 거야.”

재미와 지식 아슬아슬한 줄타기 #방송가 새 콘텐트로 자리잡아 #“싸구려 인문학”“잡담 수준” 비판도

지난 2일 첫 방송 된 tvN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유희열은 나영석 PD에게 걱정 어린 표정으로 얘기한다. 그만큼 ‘인문학’을 표방했지만 뚜렷한 주제가 없었다. 그저 음악·음식·정치·물리·문학에 정통한 이들이 경남 통영을 여행한 뒤 저녁 자리에서 수다를 떨었을 뿐이었다. 언뜻 아재들의 아무 말 대잔치인 듯 보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건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거나 “53년간 이순신 장군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분자가 얼마쯤 우리 숨 안에 들어올까”(정재승 물리학자) 같은 얘기는, 쓸데없는 지식이 얼마나 대화를 다채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알쓸신잡’은 첫 방송 시청률 5.4%(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명사들이 연예인 청중과 소통하며 강연하는 JTBC 예능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 인문학’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같이 전문가가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는 기존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꾸준히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인문학 콘텐트가 방송 아이템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tvN은 이 같은 흐름의 선봉에 서 있다. 지난달 ‘우리들의 인생학교’, ‘수업을 바꿔라’를 선보인데 이어 ‘알쓸신잡’까지 가세했다. ‘우리들의 인생학교’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면, ‘수업을 바꿔라’는 북유럽의 학교를 방문한 뒤 교육에 대해 고민해 보게 한다. ‘알쓸신잡’은 제목 그대로 잡학(雜學) 수다를 내보낸다.

방송가 인문학, 시사·교양에서 예능으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의 인문학 방송들은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다뤄왔다. 최근에는 깊은 깨달음을 주진 않지만 일상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게 하면서 지식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인문학이 예능과 만나 공진(共振)하고 있다. 시청자가 느꼈던 기존 리얼버라이어티와 관찰예능에 대한 식상함과 인문학에 대한 욕구가 만나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 인문학 바람의 시작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경기 불황의 타개책을 고전에서 찾자는 움직임이 재계에서 일었다. 2011년 3월 “애플의 DNA는 기술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양 과목과 인문학이 결합된 기술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은 도화선이 됐다. 이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지대넓얕·2014) 등 출판가의 ‘가벼운 인문학’ 붐에 이어 방송가에도 말랑말랑한 인문학 프로가 본격 등장했다. 딱딱한 강연 방송이 스타 강사 나 명사를 활용한 가벼운 강연을 거쳐 이제 예능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인문학 상품화” vs “인문학 대중화”

최근 방송가에선 여행이나 술과 같은 가볍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더욱 힘을 뺀 인문학을 다룬다.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예능계의 ‘지대넓얕’이라고도 불리는 ‘알쓸신잡’이 방송된 후 술을 마셔 얼굴이 달아오른 유희열에 대해 “불편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알쓸신잡’의 경우 인문학을 내걸었지만 그저 술 먹은 아재들의 술자리 대화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최근 인문학을 내세운 방송은 인문학을 너무 가볍게 다뤄 싸구려 인문학을 생산하고, 인문학을 상품화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OtvN ‘어쩌다어른’에 출연한 최진기 강사의 미술사 강의 논란, 올해 3월 설민석 강사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 등이 일기도 했다. 재미를 추구해야하는 예능과 깊이 있는 인문학의 만남이 빚은 부조화였다.

하지만 이런 가벼움이 인문학 대중화에 기여하지 않을까. ‘알쓸신잡’이 아니었다면 뱀장어 양식이 안 되는 이유, 미토콘드리아를 통한 모계 추적, 이순신 장군 숨결 계산법, 백석 시인과 통영의 인연 등을 쉽게 접할 수 있 을까.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이런 측면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예능과 인문학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