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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착 달라붙고 글씨가 술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4호 22면

일본의 전직 스튜어디스가 낸 책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16년 동안 퍼스트클래스 객실을 담당했던 미즈코 아키코가 저자다. 퍼스트클래스는 비행기 좌석의 3%뿐이고 일반석보다 최소 5배 정도는 비싸다. 이용 승객은 단편적 추정이긴 하지만 성공한 이들로 봐도 무리가 없다. 가까운 거리에서 이들을 관찰하며 성공의 비결을 풀어낸 내용은 공감을 자아낸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62> 프로디아 펜

비행기가 도착할 무렵 승무원은 입국서류를 나눠준다. 책 제목처럼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그때서야 일부 일반석 승객들은 부산하게 펜을 찾거나 빌리는 소동을 벌인다. 두 그룹의 대조적 모습은 당연한 절차에 대비하는 준비성과 경험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소한 대처법을 통해 성공한 이들의 습성을 짚어낸 저자의 눈썰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않던가. 그녀의 관찰 대상이 나였다면 영락없이 혀를 찼을 게다. ‘성공할 싹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군…’하고 말이다. 퍼스트클래스에 타 본 적이 없고 가끔 펜 빌려달라는 소릴 하니까.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제 입국신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영국은 예외다. 얼마 전 런던 행 비행기 안에서 받아든 입국신고서에 당황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걸 써 보지 않아서다. 손가방 안엔 당연히 들어있어야 할 펜도 없다. 정신없이 서두른 게 원인이다. 마침 스튜어디스가 지나갔다. 다짜고짜 펜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항공사 마크가 찍힌 볼펜을 바로 건네줬다. 묘한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

몇 자 되지 않는 서식이지만 빈 칸을 메우는 일은 곤혹스럽다.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영문 주소와 외워지지 않는 여권번호 때문이다. 이번에도 잘못 쓰는 바람에 한 번 더 썼다. 짜증을 냈지만 빌린 볼펜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평소 쓰던 볼펜과 다른 감촉과 부드러운 필기감이 느껴져서다. 홍보용 볼펜마저 좋은 것으로 선택한 항공사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빌린 볼펜의 기억은 까맣게 잊었다. 이후 서울의 모임자리에서 모 회사의 대표가 펜 세트를 줬다. 인사치레의 선물이려니 생각했다. 대량으로 납품받아 돌리는 기념품의 수준이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관행의 여파는 크다. 심지어 뜯어보지도 않고 처박아 둔 적도 많았으니까. 생색내며 주는 이와 떨떠름하게 받는 이의 간극은 의외로 크다.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겉치레 선물은 주지 않는 게 더 낫다.

그런데 박스 속 볼펜과 중성펜, 샤프펜슬 세 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색깔만 다를 뿐 비행기에서 본 것과 똑 같은 볼펜이 들어있었다. 큼직한 클립엔 회사의 로고가 정교하게 찍혔다. 흔한 플라스틱 재질의 펜이 뭔가 달라보였다. 집어 드는 순간 몸체의 치밀한 질감과 버튼의 부드러운 작동감이 느껴졌다. 연결 부위의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정밀함도 놀라웠다.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선물의 격조까지 신경 쓴 대표의 안목이 다시 보였다.

볼펜심 하나에 깃든 하이테크

종류가 다른 필기구는 하나같이 잘 써졌다. 유난히 돋보이는 필기감의 부드러움은 어떤 제품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펜 세트는 프로디아(Prodir) 제품이었다.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들어있는 심도 100% 스위스에서 만든다. 유명 브랜드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이기 십상인 세상이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드는 심정은 어쩔 수 없다. 스위스에서 만든 필기구란 사실 만으로 듬직한 신뢰가 생겼다.

정밀기계공업의 첨단인 나라에서 만든 펜은 과연 달랐다. 평소 쓰던 물건과 비교해 봐야 차이가 극대점으로 다가온다. 아무 종이라도 미끄러지듯 써 진다. 펜을 쥔 손의 힘도 훨씬 덜 들어갔다. 꽤 많은 양의 필기를 해도 흔히 말하는 볼펜 똥이 생기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까지 쓰던 볼펜과 뭐가 다른 거지? 궁금증이 생겼다.

똑 같아 보이는 볼펜이라도 심에 따라 필기감이 달라진다는 건 상식이다. 심의 품질, 더 정확하게 볼펜 팁의 성능이 중요하다. 볼펜의 모든 것을 담은 일본 책을 본 적 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채운 볼펜의 비밀은 놀라웠다. 간단하게 보이는 볼펜 팁을 자체 생산하는 나라는 몇 안 된다. 만만한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팁 안에 든 작은 강철 구슬인 볼 포인트가 잉크를 묻혀 굴러가면 써 지는 것이 볼펜이다. 이 부분에 단위면적 당 수 톤의 압력이 걸린다. 재질의 강도와 높은 정밀도가 필수임은 말할 것도 없다. 마르지 않고 윤활유 역할까지 해야 하는 잉크의 점도와 필기 품질도 중요하다. 볼펜은 생각보다 하이테크가 동원되는 물건이었다.

프로디아는 원래 볼펜심을 전문으로 만들던 회사로 출발했다. 매끄러운 필기의 감촉과 일정한 굵기로 써 지는 팁의 정교함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동안 익숙하게 써 왔던, 저가의 일본과 미국의 볼펜심이 뻑뻑하게 느껴진 이유를 알겠다. 최근에는 독일이나 스위스 등 유럽에서 만든 볼펜심이 인기다. 특히 프로디아의 심은 4km를 쓸 수 있는 수명을 지녔다. 보통 사람들이 평소 쓰는 정도라면 5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일상의 동반자로도 손색 없다.

플라스틱 볼펜의 느낌도 다를 수 있다

물건의 세계에선 과거의 익숙함이 새로움 앞에 무릎 꿇는 일이 빈번하다. 별 관심두지 않았던 볼펜의 성능이 몰라보게 좋아진 변화도 그 중 하나다. 팁의 메커니즘과 잉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진화했다. 예전에 없던 공법과 재료가 만들어지는 기술발전의 혜택이다. 필기할 일이 줄어든 시대에 볼펜의 완성을 이룬 역설이 씁쓸하긴 하다.

비슷한 경우는 다른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신 LP 플레이어의 성능은 전성기 때보다 훨씬 우수하다. 볼펜과 마찬가지로 첨단소재와 가공기계의 정밀도가 이제사 뒷받침된 덕분이다. 필기구와 아날로그 음반이 공통적으로 지닌 수요의 감소는 필연이다. 위기의 예측과 달리 살아남아야 하는 물건의 진화는 멈추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켜가는 인간의 열정이 동력이다.

B2B(Business to Business·기업과 기업끼리의 거래) 제품이 주류인 프로디아다.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볼펜과 선물 받은 펜 세트에 주문자 상표가 찍혀있던 이유를 알았다. 이미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홍보 수단으로 즐겨 쓰는 아이템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익숙한 상표가 찍힌 멋진 펜을 받았다면 십중팔구 프로디아일 가능성이 높다.

프로디아 필기구는 흔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상의 도구다. 다른 제품과 비교해 보아야만 진가가 드러난다. 같은 플라스틱이 다르게 다가오는 그 느낌이 놀랍다. 치밀한 재질감은 물성의 내용을 감촉으로 바꾸어주는 듯하다. 만져보면 확연하게 다가온다. 플라스틱이 그저 그런 싼 티 나는 소재가 아니라는 걸 절로 알게 된다.

유려한 굴곡과 두께로 조화된 클립과 누름 버튼의 디자인도 독특하다. 다채로운 색채와 형태의 배합으로 빚어낸 필기구가 새롭다. 플라스틱이란 소재를 따뜻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물건으로 바꾸어 놓은 역량의 힘이다. 권위 있는 디자인상을 연거푸 수상한 경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은 비슷하다. 아름다움을 입힌 일상의 물건이 특별한 인상으로 바뀌는 마법은 현실이 되었다.

제 물건의 자부심이 없다면 모든 노력은 허망해진다. 프로디아의 필기구는 단순한 상품이길  거부한다. 감각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모든 게 이해된다. 뭔가 쓰는 시간도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는 눈의 쾌감과 손의 감촉마저 이전에 없던 아름다움으로 완결되길 바란다. 프로디아가 할 일을 남겨줘야 할 이유다. ●

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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