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그들만의 수사권 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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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인권경찰-. ‘정치검찰’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인권경찰은 미래지향적인 반면 과거에 갇힌 정치검찰은 청산 대상이라는 선악의 구도가 그려진다. 정치검찰의 비대한 권력을 빼앗아 인권경찰에 넘기는 필요성, 이게 바로 수사권 조정의 논리로 성립된다. 엊그제 조국 민정수석이 수사권 조정의 전제로 ‘인권 친화적 경찰’을 주문한 배경에는 이런 메타포어가 숨어 있다. “경찰의 강한 염원을 안다”는 그의 말은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면서 ‘경찰 수사권 시대’를 준비하라는 신호다.

‘인권경찰’ vs ‘정치검찰’ 구도 속 #국민 공감 없는 추진은 또 실패

수사권 조정 문제는 10년 넘게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져온 해묵은 쟁점인 탓에 신선하지 않다. 불협화음으로 질러대는 검경의 낡은 레코드를 다시 듣는 듯 불편함이 앞선다. 국민은 배제된 채 검경 그들만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밥그릇 쟁탈전이 또 벌어질 것이라는 선입견이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인권경찰이란 새 접근법은 흥미롭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에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검찰과 경찰이 견제와 감시의 원리가 작동하도록 수사권을 조정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에도 동의한다. 대한민국 검찰엔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막강한 공권력이 쏠려 있다. 수사권·영장청구권·기소권·경찰 수사 지휘권 등 수사와 재판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독점한다. 그 유명한 미연방수사국(FBI)과 일본의 도쿄지검 특수부를 합친 것보다 더 세다.

견제받지 않는 비정상적 권력은 남용되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정치검찰이란 오명은 여기서 출발한다.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부실수사,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권한남용 의혹, 주식 대박 검사 등 온갖 비리의 뿌리도 같다. 모든 사건을 틀어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에 대거 이양하고, 검찰은 사건을 재판에 넘길지(기소)와 재판에서의 유·무죄 다툼(공소 유지)에만 집중하라는 취지는 합당하다. 한마디로 검찰에 든 바람을 인위적으로 빼자는 시대적 요구가 담겨 있다.

경찰로의 권력이동은 하지만 온당할까. 경찰엔 원죄(原罪)가 있다. 경찰이 검사의 수사 지휘를 받는 체계는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때 명문화했다. 이른바 ‘경찰 파쇼화’를 막자는 취지였다. 일제 때 친일 경찰을 주축으로 한 경찰조직을 구성할 수밖에 없던 해방 직후의 현실이 작용했다. ‘순사 문화’에서 비롯된 인권 침해, 낮은 인권 의식과 자질이 원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민주화 시대에도 경찰이 원죄적 한계를 말끔히 털어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만 명의 경찰에게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범죄·치안·방범·시위·교통까지 시민생활에서 경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검찰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국민 인권의 침해가 커질 수 있다. 조직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크고 작은 비리와 사고, 인권침해가 자주 빚어진다.

인권경찰은 이러한 원죄론과 자질론의 벽을 돌파하고 국민들로부터 수사권 조정의 명분을 끌어낼 수 있는 절묘한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집회 현장에 경찰력, 살수차, 차벽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경찰청의 어제 발표가 인권경찰의 개념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검찰의 권력 집중도 싫지만 경찰의 세력화도 걱정해야 하는 게 우리 사회의 딜레마다. 솔직히 둘 다 오십보 백보 아니냐는 냉소가 그래서 나온다. 일단 칼은 쥐여주면 휘두르고 싶은 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과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추진이 바람직하다. 검경의 권한 나눠먹기가 돼서도 곤란하다.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일 때가 있다. 수사권 조정의 지향점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기관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 국민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그러려면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필수다. ‘바람과 같은 군주의 덕으로 풀과 같은 백성의 마음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맹자). ‘수사권 조정,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지’라고 국민은 묻고 있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