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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시조 영정과 정말 닮았죠? 경산에 터잡고 사는 발해 후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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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발해 시조 대조영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발해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 대조영 벽화 앞에 모였다. [경산=프리랜서 공정식]

발해 시조 대조영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발해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옆 대조영 벽화 앞에 모였다. [경산=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다. 태 회장이 자물쇠를 풀고 창호문을 열자 컴컴한 방 안에 영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해 시조 대조영 황제(?~719)의 영정. 영정의 크기는 170㎝가 넘었지만 건물이 좁아 제사상 뒤에 놓여 있다.

영순 태씨 집성촌 ‘발해마을’ #임진왜란 때 일족이 내려와 살아 #142명 후손 얼굴 분석해 표준영정 #“해동성국 왕릉 재현, 역사관 건립 #중국의 동북공정 허점 밝힐 것”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차지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렸던 고대국가 발해. 그곳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대조영을 기리는 재실은 황제 영정을 모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태 회장은 “족보로 보나 발해 왕궁터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보나 발해는 우리 역사가 분명한데도 발해의 유산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은 처참한 수준”이라며 “황제 영정을 시골 구석의 낡고 좁은 건물에 모셔 놓아 후손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된 곳은 ‘발해마을’이다. 영순 태씨 집안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태(太)와 대(大)는 서로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통해 예로부터 혼용해 왔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발해가 멸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10세기에 멸망했다. 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장군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로 삼은 영순 태씨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피란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60명 정도가 산다. 이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이다.

지금 발해마을엔 곳곳에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대조영이 말을 타고 들판을 누비는 벽화도 세 군데에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문패도 걸어 뒀다. 해동성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작품이다.

태영철(63) 송백2리 이장은 “마을 알리기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관을 지어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의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자료로 채울 것”이라고 했다. 2015년부터는 1년에 두 차례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엔 독특한 사연도 숨어 있다. 태씨 집안 남성들의 얼굴이 이 영정에 스며 있어서다. 표준영정을 만들 때 모두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특징을 분석해 영정에 녹여냈다. 우선 182㎝ 떨어진 거리에서 105㎜ 망원렌즈로 정면과 측면, 45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 사진을 찍었다. 모두 710장의 사진을 자료화했다. 이를 한국인 남성 표준얼굴과 300~500군데 기준을 놓고 대조했다. 그렇게 표준얼굴에서 벗어나는 특징들만 추출해 얼굴을 만들고 이를 민두상으로 조각했다.

이 모든 과정은 ‘얼굴 박사’로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장이 진행했다. 조 소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해부학 권위자다. 그는 “대조영의 실제 생김새가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후손들의 얼굴 특성을 분석해 표준영정을 만들었다”며 “태씨 집안 남성 후손들의 얼굴을 종합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걸 기초로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발해마을은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마을 안에 재현할 계획이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 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5월 중국 지린(吉林)성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퍼 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 향사를 지낼 때 한 유림이 ‘영정이 제사상 위로도 못 올라가고 있으니 국가 기운이 떨어져 온갖 악재가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며 “앞으로 대조영 황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져 이 나라에도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산=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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