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양심가게 … 한 달 동안 사라진 물건 하나 없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북동쪽으로 약 4㎞ 떨어진 대둔도. 전체 면적 3.34㎢인 이 섬의 3개 마을 중 하나인 오리(옛 지명 오정리) 주민들은 여러 불편을 감내하며 산다. 생활필수품을 살 가게가 없을 정도로 정주 여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전남 신안군 대둔도 ‘오정리 전빵’ #지역 어르신 생필품 수급 돕고자 #청년회 1000만원 모아 가게 오픈

이런 마을에 지난달 주민들의 삶을 바꿔놓은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옛 마을회관 건물을 고쳐 만든 일명 ‘양심가게’다. 소규모 동네 가게를 의미하는 ‘전빵(전방·廛房)’에서 말을 따와 ‘오정리 전빵’이라는 간판도 내걸었다.

대둔도 양심가게를 연 오리 청년회 김근중(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회장과 회원. [사진 오리 청년회]

대둔도 양심가게를 연 오리 청년회 김근중(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회장과 회원. [사진 오리 청년회]

양심가게에는 휴지부터 라면·생수·양념까지 식료품과 생필품이 갖춰져 있다. 규모는 작지만,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을 판매한다. 주민들의 양심을 믿는 가게인 만큼 ‘전빵’을 보는 주인은 따로 없다. 마을 주민들은 각각의 물품 아래 붙은 가격표를 보고 동전과 지폐를 가게에 두고 간다.

양심가게가 운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 오히려 물품 가격보다 훨씬 많은 돈을 놓고 간 주민도 있었다. 양심가게를 만든 건 이 마을 청년 10여 명으로 구성된 오리 청년회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부모 같은 노인들이 가게가 없어서 큰 불편을 겪는 모습을 보고 양심가게를 열게 됐다.

이 가게가 문을 열기 전까지 오리 주민들은 치약 하나만 떨어져도 배를 타고 소형 마트가 있는 흑산도까지 가야 했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여 분이지만, 하루 2차례만 운행하는 데다 기상 여건이 나쁠 경우 배가 뜨지 않아 큰 불편을 겪어왔다.

큰 마음을 먹고 배를 타고 나와 흑산도에 도착하더라도 불편은 있었다. 모처럼 섬을 나온 만큼 마트와 철물점·우체국 등을 모두 들르려면 배가 다시 떠나는 시간에 맞추기 어려워서다. 오리에 사는 70여 가구 120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70%가 넘는 노인들은 이런 불편을 안고 살아왔다.

주민들은 오리 청년회를 중심으로 십시일반 1000만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마을회관을 개조하고 물품 진열에 쓸 선반과 생필품을 구매했다. ‘오정리 전빵’은 지난달 초 문을 연 이후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라는 공간을 넘어 주민들이 안부를 묻고 외로움을 달래는 소통의 공간이 됐다.

김근중(43) 오리 청년회장은 “어릴 때부터 부모처럼 여기고 살아온 마을 어르신들의 불편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양심가게가 문을 연 이후 주민들끼리 소통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웃에 대한 애정도 더욱 각별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